련공의 길에서 찾은 보람찬 삶 (3)

Date: 11/07/2019 | Source: Ryomyong | Read original version at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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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공의 길에서 찾은 보람찬 삶

(3)

30년가까운 입북생활의 나날에 있은 가지가지의 추억가운데서도 내가 일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것은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그이의 육친적인 사랑과 배려를 받아안던 영광의 나날이다.

해빛도 유난히 빛나던 1955년 11월 20일이였다. 그때 인민경제대학에서 공부하고있던 나는 이날도 아침부터 기숙사호실에서 전날에 배운 학과목을 복습하고있었다.

그런데 중낮이 되여올무렵 한학급에서 공부하는 동무가 호실로 급히 들어서더니 어버이수령님께서 우리 대학에 찾아오셨다는것이였다.

《아니, 수령님께서요?》

이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시를 바로하며 자세를 정중히 취하였다. 너무도 놀라운 감격과 흥분이 한시에 몰려들어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채 나는 한동안 그자리에 서있었다.

바로 이때 호실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대학간부들과 함께 방안에 들어서시는것이였다.

정말 얼마나 뵙고싶고 가까이 모시고싶던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던가!

내가 위대한 수령님께 허리굽혀 조용히 인사를 드리자 그이께서는 나의 두손을 꼭 잡아주시면서 서글서글하신 음성으로 동무는 남반부에서 무슨 사업을 하였는가고 물으시는것이였다. 나는 지난날의 자신이 너무도 죄송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반부에서 해온 일을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애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면서 남조선에서 《국회의원》생활을 하다나니 무슨 공부를 하였겠는가고 하시면서 이때까지 민주교육을 받지 못했을터이니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고 간곡히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통일을 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겠는가 하는 조국통일방안들을 많이 생각하고 연구하여보라고 하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말씀에 나는 뜨거워오르는 격정을 누를길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로 말하면 반공의 길에서 허덕이다가 입북한지 그리 오래지 않았고 또 배운것도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과 민족앞에 떳떳치 못한 경력을 가진 저를 책망하실 대신 오히려 크게 믿으시고 그토록 나라의 통일대사까지도 함께 의논해주시니 한순간에 나의 눈굽에는 뜨거운것이 치밀어올랐다.

이윽하여 나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다정하신 음성으로 동무의 건강이 좋지 못한것 같은데 치료도 받고 공부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나는 후더워오르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었다. 털어놓고 말하여 내가 가지고있는 병이란 어렸을 때 생긴 대장출혈증과 륵막염이였는데 이것은 그리 심한것도 아니였다. 그러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름없는 한 입북자의 얼굴빛에서도 건강을 헤아려보시고 이렇듯 따뜻한 은정의 말씀을 하여주시는것이 아닌가!

친부모의 사랑에도 비길수 없는 이처럼 크나큰 사랑을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도 언제 어느 누구에게서도 받아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온 민족이 그토록 흠모하고 따르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하고 거룩하신 그이께서 세상 그 어디에도 비할수 없는 육친의 사랑을 베풀어주시니 나는 그만 두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걷잡을수 없어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였다.

들먹이는 나의 어깨너머로 잠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무슨 애로가 있으면 제기하라고 하시면서 동행한 일군들에게 이 동무의 가족은 지금 어디 있는가, 가족이 있으면 공부하는데는 좀 지장을 줄수 있지만 건강이 좋지 못하니까 가족을 다 데려오도록 하라고 하시는것이였다.

그리고 호실에는 한방에 몇명이 있는가, 이불은 얇지 않는가를 손수 살펴도 보시고 다시금 총장에게 나의 병치료도 받게 하고 공부도 잘 시켜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시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대학을 다녀가신 그날 나는 온밤 잠들수 없었다. 지난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무엇 하나 해놓은 일도 없는 한 입북자에게 분에 넘치는 그토록 크나큰 육친의 사랑과 배려만을 돌려주시는 어버이사랑의 그 품이 너무도 뜨겁고 고마와 나는 베개잇을 적시며 울고 또 울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나는 현대적설비를 갖춘 중앙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였다. 병원의 의사와 간호원들은 입원하는 첫날부터 고가약과 희귀한 보약까지 써주며 극진히 치료해주었다. 오랜 세월 고질적인 난치의 병으로 알려졌던 대장출혈증은 달포가 지나자부터 눈에 뜨이게 나아지게 되고 나의 건강은 날을 따라 회복되여갔다.

그러던 어느날, 해빛밝은 방안의 침대우에 앉아 신문을 보고있던 나는 《아버지!》하는 어린것의 야무진 목소리에 놀라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네살잡이 나의 딸 선희가 방긋이 웃으며 서있는것이였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어린것에게로 달려가며 나는 영문을 몰라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나 엄마하구 같이 왔다. 평양에.》

《그래?! 어떻게 왔다더냐? 응?》 너무도 생각밖의 일이여서 나는 딸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다급히 물었다. 이때 문이 열리며 보따리를 꾸려쥔 안해가 뒤따라 들어서는것이 아닌가.

《아니, 무슨 일로 왔소?》

나는 안해를 보는 순간 오지 말라는 면회를 온 모양으로만 알고 위로의 말대신 대뜸 꾸지람하듯이 물었다.

《당신두 기뻐하세요.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번에 우리 가족들을 모두 평양에 올라와 살도록 배려해주셨어요. 그래서 저 중심거리에 여러칸짜리 집까지 받구 이렇게 오는 길이예요.》

《?!…》

더 묻지 않아도 나는 그 사연을 알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대학에 찾아오시여 하시던 그 사랑의 말씀이 이렇게 빨리 현실로 옮겨지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어버이수령님의 그처럼 따뜻한 사랑과 그이의 보살핌속에서 병을 완치한 나는 그후 다시 대학에 돌아와 건강한 몸으로 학습에 열중하였다.

우리 나라의 믿음직한 민족간부양성기지의 하나인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한 나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창립되던 첫시기에 벌써 그 회원으로 되였으며 이후에는 큰 기업소의 부지배인사업을 겸하여 맡아보게 되였다.

오늘까지 나는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진행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결성대회를 비롯한 크고작은 정치행사들에 참가하는 영광을 지녔으며 국가적명절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가지 국가수훈의 영예까지 받아안게 되였다.

이뿐이 아니다. 지금 나는 나라의 크나큰 혜택속에서 생활상 아무런 근심걱정을 모르고 생활하고있다.

해마다 꼭꼭 받고있는 정휴양은 제쳐놓고라도 무병장수를 위한 치료혜택과 명승지들에 대한 려행, 독서 등 정서생활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구석구석에는 어느것이나 다 이 한몸을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손길이 스며있다.

이 모든것을 생각할수록 나는 내가 과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해놓은것이 무엇인가를 돌이켜보게 된다.

올해 내나이 예순여섯이다. 이미 환갑도 지나가고 이제는 나도 인생의 70고개를 바라보고있다. 인생말년에 이른 나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비록 해놓은 일은 없지만 어떤 바람에도 드놀지 않을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정녕 나는 나의 옛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오랜 입북생활의 나날에 내가 찾은 그 고귀한 진리를 말하고싶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와 당중앙의 현명한 령도를 받는 북반부 공산주의자들은 지난날 나라와 민족앞에 일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일지라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나선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기꺼이 포섭하여 영원히 함께 손잡고나간다는것을…

련공의 길, 애국의 길만이 참다운 삶의 길이다.(끝) (1984년 씀)

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김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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