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나 눈이 오나(제2회)

Date: 12/07/2019 | Source: Ryomyong | Read original version at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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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수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2회)

김흥곤

1. 어둠속에서

(2)

내가 지금 글을 쓰고있는 평양에서 고향땅 광주까지는 447km, 천여리가 훨씬 넘지만 마음속에서는 천리도 지척이라는 말처럼 나에게는 언제나 그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조상의 뼈가 묻히고 오늘도 그 누구인가 우리 일가친척들이 살고있을 고향인데야.

조선반도의 남서부에 위치한 광주는 세나라시기 백제에 속해있을 때 《무진》 혹은 《노지》라고 하였다. 그 유래는 똑똑치 않은데 《무진》은 《무더러/무다라》의 리두식표기이고 《노지》는 《노기》에 대한 리두식표기이다.

후백제때에는 《무주》로 개칭되였고 그후 여러 봉건왕조를 거치며 이름이 여러번 바뀌였다.

940년 고려태조인 왕건왕때부터 《광주》로 불리워지며 후세에 전하여왔다.

1895년 조선봉건왕조는 전라도 광주목을 광주군으로 승격시켰으며 다음해 전라도를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분할하면서 광주군을 전라남도의 소재지로 만들었다.

그후 일제식민지통치시기 광주면이 읍으로, 광주읍이 다시 광주부로 되였으며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되였다.

바로 이 광산군 서창면 룡두리 학동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2대외독자로 태여난 나는 어릴 때부터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어른들에게서 고향땅에 깃든 많은 자랑과 전설들을 전해들으며 자랐다.

광주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왜적들을 벌벌 떨게 했던 이름난 청년의병장 김덕령이 태여난 곳으로 유명하였다.

김덕령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왜적이 침입하자 선전관으로 의병대오를 뭇고 잘 싸웠다.

1594년 의병부대들이 통합된 후 도원수 권률의 휘하에서 왜적들이 호남지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상도 진해와 고성지방에서 싸우던 김덕령은 충청도 홍산(부여)에서 반란을 일으킨 리몽학일당을 진압하라는 령을 받게 되였다.

출전에 앞서 그는 갑옷과 투구차림으로 광주 망월동에 있는 정지장군(고려때 왜적을 무찌른 장군)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였는데 이때 허리에 차고있던 칼끈이 풀어져 떨어지자 주위사람들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출전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김덕령은 그대로 출전하였는데 홍산에 이르기 전에 반란이 진압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부대로 돌아오게 되였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그의 명성을 시기질투하고있던 충청도 순찰사 신경행은 김덕령이 모반을 꾀한다고 상주하여 체포하게 하고 심한 고문을 들이대였다. 결국 김덕령은 28살의 젊은 나이에 옥사하고말았다.

그후 김덕령의 무죄가 확인되고 명예가 회복되여 《충장공》이라는 시효를 받게 되였다.

광주의 여러곳에는 의병장 김덕령과 관련한 지명들도 많았다.

김덕령이 의병들을 무장시키기 위하여 칼과 창을 벼린 굴이라고 전해지는 무등산중턱의 주검굴, 의병들을 모으기 위해 길을 떠난 김덕령이 해진 짚신을 다시 삼아신고 떠났다는 신삼은 바위를 비롯하여 오늘의 광주시에도 그의 시호를 단 거리인 충장로가 있다.

현대에 와서도 광주는 침략자들과 반동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투쟁의 도시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1929년 11월 3일 일본학생들의 집단적인 불량행위를 기화로 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전국각지 194개 학교의 6만여명 학생들과 각계층 인민들을 투쟁에로 떨쳐나서게 하여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우리 인민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불굴의 투지를 과시한 대중적반일투쟁이였다.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인민봉기는 미국과 전두환괴뢰도당의 파쑈통치에 큰 타격을 준 높은 형태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이였다.

그해 3월부터 남조선전역에 료원의 불길처럼 타번진 청년학생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은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것을 계기로 광주인민봉기로 전환되였고 항쟁의 불길은 도안의 대부분지역과 전라북도에까지 번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미국과 전두환살인악당들은 환각제까지 먹인 괴뢰군공수특전대를 들이밀어 수많은 광주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봉기를 탄압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였다.

희생된 광주시민들과 청년학생들이 묻혀있는 망월동공동묘지는 오늘도 민주와 통일을 위하여 목숨바친 령혼들의 넋을 사람들의 심장속에 새겨주고있다. 여담삼아 말한다면 광주시 북구에 위치하고있는 망월동은 예로부터 《옥토망월형》의 명당자리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무덤을 써왔고 지금은 공동묘지로 되였다. 망월동이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망월동공동묘지가 자리잡고있는 무등산도 투쟁의 도시 광주와 더불어 조선사람들 누구나의 가슴속에 새겨져있다.

예로부터 광주의 진산으로서 《무진악》, 《서석산》이라고도 불리워온 무등산은 산이 높고 커서 그 둘레가 사방 50여리에 이르며 옛 기록에 쓰기를 이 산에 오르면 제주도의 한나산, 경상도 남해의 거제도 등이 다 눈아래에 보인다고 하였다.

이 산의 서쪽 양지벼랑에 빗살처럼 줄줄이 선 천수십개의 바위가 있는데 높이가 100여자나 된다. 《세종지리지》에는 오래도록 가물다가 비가 올무렵이나 비가 개일무렵이면 이 산에서 자주 우뢰소리와 같은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수십리밖에까지 들리군 한다고 씌여있었다.

그리고 항간에 《무등산곡》이라는 노래가 전해오는데 백제때 이 산을 성으로 삼은 후부터 백성들의 마음이 편해져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한 노래와 전설이 깃든 무등산에서 오늘은 해마다 통일애국의 길에서 쓰러진 시민들과 청년학생들의 념원이 담긴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지며 사람들을 조국통일과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로 부르고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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