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수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10회)

김흥곤

2. 애국의 뿌리

(4)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애국열의가 높고 대세에 밝았으며 새로운 시대사조에도 민감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불법적인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고 조선을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시킨 소식을 듣고 학동마을에서 제일먼저 대성통곡한 사람이 바로 당시 12살밖에 되지 않았던 아버지 김병준이였다고 한다. 그때 증조할아버지를 위시한 학동마을의 일가친척들이 모두 종가집에 모여앉아 망국의 한을 터치며 일제를 반대하고 조선독립을 위한 투쟁에 떨쳐나설것을 결의했는데 아버지는 어린 나이였지만 주먹을 부르쥐며 어른들과 함께 맹약을 다졌었다.

그후부터 아버지는 망국노의 처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려면 고리타분한 유교경서나 읽고있을것이 아니라 신학문을 깨쳐서 왜놈들을 따라앞서야 한다고 하면서 어른들의 승낙도 없이 머리태를 자르고 30리나 떨어진 도청소재지인 광주와 송정, 대촌을 비롯한 여러곳에 새로 설립된 보통학교들을 찾아다니며 교재를 얻어가지고 자체로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공부하면서 모를것이 있으면 그달음으로 수십리길을 달려가 선생이나 학생들에게 물어보군 하였는데 아버지의 남다른 향학열에 감동된 그들은 기꺼이 도와나서며 필요한 참고서들도 주군 하였다.

그처럼 독학에 열중하다보니 집안의 농사일을 잘 돕지 못하여 종종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듣군 하였지만 욕을 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은근히 대견하게 여기였다.

20대에 이르러 아버지는 삼촌인 작은할아버지 김홍두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와나섰다.

작은할아버지는 3. 1인민봉기때에 광주일대의 투쟁을 앞장에서 이끌었는데 아버지는 그를 도와 사람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수천장의 격문을 쓰고 심부름도 해주었다.

그후 작은할아버지는 상해로 가서 림시정부활동에 관여하다가 1920년경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영향으로 아버지도 민족주의운동에 나서게 되였다.

그러던 이듬해 여름 어느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 전이였다.

집집마다 부지런한 녀인들조차 잠에서 깨여나지 않았던 그 새벽에 난데없이 100여명의 무장한 일제경찰들이 학동마을로 달려들었다.

우리 집으로 달려든 놈들은 광주시내에서 독립운동자들을 만나 회합을 진행하고 간밤에 늦게야 돌아와 풋잠에 들었던 작은할아버지를 체포한데 이어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갓 시집을 온 새각시였던 어머니까지도 모조리 련행하여 고개너머 서창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로 끌고갔다.

이어 온 마을을 발칵 뒤지며 작은할아버지가 무기를 감춘 곳을 대라고 야단을 했다. 놈들은 집집의 움까지 뒤지며 지랄을 하다가 종시 무기는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주재소에 끌려간 작은할아버지는 인차 광주를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였고 일가친척들은 며칠후에야 겨우 풀려나오게 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주일대에서의 민족주의운동은 즘즘해지고 대신 행세식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나 《공산주의운동》바람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자들은 아버지를 비롯한 학동 김씨들을 상해림시정부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라고 몰아붙이면서 덮어놓고 반대배척하였다.

이에 환멸을 느낀 아버지가 새로운 투쟁의 길을 모색하던무렵에 마침 사촌동생인 김병업이 나타났던것이였다.

광주학생사건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다니던 김병업은 학생들의 앞장에서 시위투쟁을 주도하다가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여 1년반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후에는 경성에 가서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일본 도꾜로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사회주의운동자로 된 사람이였다.

원래 우리 아버지는 병업삼촌을 남달리 귀해하면서 가까웠던 사이인지라 그가 여러곳을 떠돌아다니며 사회운동을 진행하는것을 물심량면으로 적극 도와주었었다. 그러면서도 무산혁명을 부르짖는 그의 행동에 대하여서는 비판적으로 대하군 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