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9, 2024
KCNA Ryomyong

비가 오나 눈이 오나(제127회)

Date: 07/12/2019 | Source: Ryomyong | Read original version at source

중편수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27회)

김흥곤

6. 시련을 이겨내며

(5)

이어 나는 동덕녀자중학교에 있는 백남규선생에게 오늘은 사정이 있어 행군을 중지했으므로 저녁에 《홍농숙》으로 가지 말고 (선생은 매일 그곳을 오가며 나를 맞아주군 하였다.) 도화동의 집으로 오셨으면 한다고 전화를 했다.

그날은 남산을 한바퀴 빙 돌았다. 거리가 50리쯤 되였는데 여느때없이 힘이 솟구쳐오르는것만 같아 씽씽 걸음을 옮겼다.

저녁에 도화동집으로 들어서니 백룡기부부는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잠시후 백남규선생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과 마주앉은 나는 격동된 심정으로 아침에 있은 남대문구호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알고보니 그들도 이미 학생들로부터 그 소식을 들어서 알고있었다. 온 집안은 감격과 기쁨으로 설레이며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그날 저녁 우리들은 나의 행군결과에 대한 소감도 나누었는데 10일째나 행군했지만 얼굴과 몸이 좀 깠을뿐 신체는 오히려 더 튼튼하게 단련된것 같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러다가 아무런 효과도 없으면 야단이라고 은근히 걱정을 해주었다.

그들의 걱정을 나는 웃음속에 유식한 말로 안심시켰다.

《원래 질적변화는 서서히 진행되는 량적변화를 거쳐서 급격히 일어나는 법입니다. 례를 들어서 끓는 물은 99℃까지는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지만 100℃가 되면 급격하게 수증기로 변하게 되지요. 저도 앞으로 20회쯤 더 행군을 하게 되면 아마 뼈만 앙상하게 남아 몰라보게 될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계남형수나 조카들이 저 에짚트의 미이라가 살아온줄 알고 깜짝 놀랄겁니다. 하하.》

이렇게 20번째 행군을 진행하는 날이였다. 그날의 행군은 《홍농숙》에서 출발하였다. 이제는 등산배낭이 잔등을 짓눌렀고 다리는 휘청거리며 꽈배기처럼 꼬이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었다. 간신히 룡산까지 왔으나 경성역, 남대문, 서대문로타리까지의 로정을 거칠 힘이 더는 없었다. 그래서 룡산철도공장 뒤골목을 거쳐 지름길로 도화동집에 도착하니 밤 9시가 훨씬 넘었다.

집문턱을 간신히 넘어선 나는 그대로 땅에 쓰러지고말았다. 리계남이 사탕가루를 탄 미음 한그릇을 입에 갖다대주었으나 정신없이 받아마신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보니 집안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있는것이였다. 내가 눈을 뜨자 그들은 일시에 《깨여났구나!》하며 반갑게 웨치였다.

백남규선생은 연신 《용타! 장하다!》고 외우며 내가 잘못되는줄 알았다고 걱정에 젖어 말했다.

나는 긴장되여 벌떡 몸을 일으키며 《저는 죽지 않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리계남이 가져다주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왜놈들이 불합격을 놓을만큼 몸이 상하지는 않은것 같았다.

《아직 너무 건강한 모습같습니다. 래일부터는 단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다음날부터는 매끼 미음과 숭늉 반사발씩 마시면서 단식에 들어갔다. 낮에는 도화동집에서 1km쯤 떨어진 한강의 마포항부두까지 간신히 산보를 하며 몸을 움직이였다. 그렇게 한주일이 지나간 뒤 거울을 들여다보니 아직 바라던 모습이 안된것만 같았다.

나는 종로구 창성동에서 《삼성약국》을 운영하고있는 백효기(백남규선생의 딸)를 찾아갔다.

《매끼 미음과 숭늉만을 마시면서 한주일간이나 단식을 했는데도 아직 이렇게 <건강한> 모습이니 잘못하면 왜놈들의 검사에서 합격될것 같아서 정제한 피마주기름을 좀 얻으려고 왔어요. 그걸 먹으면 몸안이 수분이 싹 빠진다는데 누님생각엔 어때요?》

백효기는 요즘 종로구에 있는 《징병검사장》에서 한창 징병자들에 대한 신체검사를 진행하고있어 알아보았는데 첫날에는 키와 몸무게를 재고 불구가 아닌가를 확인한 다음 결핵반응주사를 놓으며 다음날에 신체검사를 하여 종합적인 평정을 내린다고 하면서 피마주기름을 먹으려면 첫날 검사를 하고 난 뒤에 먹어야 바라는 효력을 볼것 같다고 일깨워주었다.

드디여 징병검사날이 왔다. 나는 서대문구의 사립배제중학교강당에 차려놓은 검사장으로 갔다.

그날은 300여명정도의 청년들이 검사장에 왔는데 대부분이 마포구일대의 청년들이였다. 왜놈들은 《징병에 응하는것은 황국신민의 의무》라는 내용의 설교를 한시간가량 한 다음 백효기의 말대로 간단한 측정과 검사를 하고나서 돌려보내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백효기가 주는 일정한 량의 피마주기름을 마시였다. 한시간쯤 지나니 배속이 와글와글 끓으며 여러차례나 뒤간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자 전신의 맥이 쑥 빠지고 눈이 푹 꺼져들어가 영 딴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나는 겨우 운신을 할수가 있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강심제와 포도당주사를 들고온 백효기와 리계남이 온밤 곁에서 간호를 해주었다.

다음날 나는 백남규선생과 백룡기의 부축을 받으며 징병검사장으로 갔다. 나의 가슴은 무척 두근거리였다. 바로 그날에 나의 전도와 운명이 결정되기때문이다. 선생과 형님은 밖에서 기다리였다.

전날에 맞은 결핵주사반응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평가받은 나는 종합평정을 하는 왜놈장교앞에 가 섰다.

놈은 나를 보자 대뜸 이마살을 찌프리며 《어, 보기에도 끔찍하군. 이런 놈이 어떻게 신체검사장에 왔는가. 어이, 왜 이렇게 몸이 쇠약한가?》하고 호통을 치는것이였다.

나는 짐짓 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2년전부터 신경쇠약증이 심해져서 광주의 도립병원과 경성의 대학병원에 다니며 약도 타먹고 치료를 했지만 밤마다 잠이 오지 않고 입맛이 없어 밥을 못 먹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치료를 해서 합격되여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만…》하고 대답하였다.

나의 대답에 그 장교놈은 《자식, 교원질을 해먹어서 정신상태만은 좋은데 그 꼴로는 안되겠다!》하더니 《병종》이라고 선포하는것이였다. 간신히 버티고서있던 나는 금시라도 선자리에서 껑충 뛰여오르고싶었다.

《성공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환성을 올렸다. 《병종》이라는 빨간 도장을 찍은 신체검사표를 받아든 나는 비칠거리며 강당문을 나섰다.

내 손에 쥐여진 검사표를 받아본 백남규선생과 백룡기는 나를 얼싸안아주며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백선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보니 전차를 타고 한발 앞서 도착한 백룡기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백효기가 주사약을 꺼내놓고있었고 리계남은 한창 록두미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나는 그들앞에 무릎을 꿇고앉았다.

《오늘의 승리는 결코 저 혼자서 이룩한것이 아닙니다. 아버님과 형님, 형수님과 누님을 비롯한 백씨일가분들의 지성어린 방조와 지원이 없었더라면 이런 승리를 이룩하지 못했을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이번 시련을 이겨내도록 적극 이끌어주고 고무해주며 물심량면으로 도와주신 여러분들의 사랑과 의리, 믿음과 기대를 영원히 잊지 않고 앞으로 조국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한몸바쳐 싸우겠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머리숙여 큰절을 올리였다.

사람의 인생길에는 시련과 난관의 언덕이 막아설 때가 있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 하여도 그러한 언덕을 넘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때에 진정으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것은 세속적인 인정이나 의리만으로는 누구나 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사상과 뜻을 같이하고 깨끗한 량심을 지닌 혁명가들만이 동지를 손잡아 이끌어주고 떠밀어줄수 있는것이다.

진정 백남규선생의 일가는 나에게 있어서 넘기 힘든 시련의 언덕을 넘어 위대한 김일성장군님만을 따르는 혁명의 한길을 끝까지 갈수 있도록 도와준 첫 동지들이였다.

그때 나는 《사람은 집에서는 가족들에게 의지하고 밖에 나가서는 동지에게 의지하여야 한다.》고 늘 외우며 동지들을 찾아 먼길을 떠나던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사실 백남규선생은 아버지의 수많은 동지들가운데 한사람이였다. 하지만 그는 친구의 의리나 인정에 앞서서 나를 반일애국의 길에서 생사를 함께 할 동지로 여기고 도와주었다.

나는 동지야말로 혁명가의 가장 귀중한 밑천이고 재부라는것을 뼈속으로 느끼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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