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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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2 제6장 시련의 해 2. 마지막모습

Date: 31/07/2020 | Source: Ryugyong | Read original version at source

주체109(2020) 년 7월 31일 《회고록》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

제6장

시련의 해

2. 마지막모습

우리 부대가 원정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치고있던 어느날 철주동생이 나를 만나려고 소사하에 찾아왔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소영자령에서 일본지도관이 인솔하는 위만군수송대를 들이쳤다는 소문이 안도경내를 넘어 돈화와 연길지방에까지 파다하게 퍼져 어데 가나 그 전승담으로 술렁거릴 때였다. 송강, 대전자, 류수하자의 혁명조직들에서는 소영자령전투의 진상을 알려고 소사하에 일부러 사람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나는 처음에 동생도 그런 사명을 띠고 나타난것이라고만 짐작하면서 심상하게 대하였다.

그런데 내 짐작과는 달리 철주는 소영자령매복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대원들이 제식훈련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지휘부옆방에서 원정대에 망라된 대원들과 함께 짚신삼이로 하루해를 보내는것이였다. 지휘부가 제정한 원정준비품들의 항목에는 짚신도 포함되여있었다.

나는 짐작을 바꾸어 철주가 소사하에 나타난 목적은 원정대의 출발준비를 거들어주려는데 있을것이라는 제나름의 판단을 하였다. 저녁시간이 다되였을 때 철주는 마을의 농민조직책임자를 만나보고 지휘부로 돌아오는 나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왔던김에 저녁이나 같이 나누고 가라고 하였지만 그 청도 사양하면서 그냥 돌아가겠다고만 하였다. 동생은 무슨 말을 할듯말듯 하면서도 종시 그것을 입밖에 내지 않고 좀 류다른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불안스럽게 살펴보는것이였다.

나는 륙감적으로 동생이 원정준비나 거들어주자고 소사하에 온것이 아니라는것과 그가 나를 찾아온것을 보면 필경 무슨 사연이 있다는것을 간파하였다. 나에게 터놓지 않으면 안될 사연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어머니나 동생자신의 신상에 생긴 어떤 곡절일것이였다.

나는 지휘부에 들리지 않고 마을어귀까지 철주를 바래주면서 동생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토기점골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니냐?》

내가 토기점골이라고 한것은 집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이였다. 집이라는 말은 어쩐지 입에 올리기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어요.》

철주는 이렇게 대답하고나서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연극을 잘하는데다가 해학이 풍부한 동생이여서 내 눈을 속일수 있는 웃음쯤은 얼마든지 지어낼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웃음은 서글픈 빛을 띠고있었을뿐만아니라 한쪽귀퉁이가 인차 이그러져버리였다. 동생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의 어깨너머로 먼 허공을 응시하였다.

《무슨 곡절이 있으면 있다구 실토를 해야지 말을 안하구 그대루 가버리면 나는 나대루 걱정이 될게 아니냐. 이것저것 재지 말구 어서 말해라.》

철주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더 위독해진것 같애요. 이틀째나 밥 한숟가락 드시지 않았어요.》

동생의 그 말은 뢰성벽력처럼 내 고막을 두드렸다. 나는 어머니가 음식을 전페하였다는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머니가 지금까지 중병으로 시름시름 앓아오셨다는것은 나도 잘 알고있었다.

우리가 팔도구에서 살 때만 하여도 어머니는 병상에 드시는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무송에 와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길림으로 중학공부를 떠난 다음부터는 종종 병환에 시달리였다. 철주가 이따금씩 편지로 나에게 그런 사연을 알려주군 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런 편지를 받고 어머니가 혹시 수토병에 걸린것이 아닌가고도 생각하였다. 무송지방의 주민들가운데는 토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 이 병에 걸리면 손이 까드라들고 손가락매듭이 굵어지며 목병이 나서 로동능력을 상실당할뿐만아니라 30살을 넘기지 못하고 생명을 잃는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오동진이 무송에 와서 우리 어머니에게 길림으로 이사하라고 권고한 동기의 하나도 바로 이 수토병의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하자는데 있었다.

방학이 되여 집에 돌아가보니 어머니는 수토병이 아니라 몸살을 앓고계시였다. 한평생 휴식이라는것을 모르고 고달프게 살아온 과로의 독이 마침내 어머니의 건강을 침습하고야말았구나 하는 분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무서운 수토병이 아니라는 말에 얼마간 마음을 놓았다.

어머니는 안도에 오신 후부터 가슴앓이로 고생하였다. 그 당시는 가슴앓이를 《적》이라고 하였다. 가슴속에서 큼직한 무엇이 자꾸 치밀어오르는것 같다는것이 어머니의 호소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위암이 아니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사들은 《적》이 섰다고 진단은 내리였지만 치료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병에는 백약이 무효였다. 그저 가슴이 치미면 침상에 눕거나 끼니를 건느거나 미음을 묽게 쒀서 몇술 뜨는것이 유일한 치병방법이였다.

어머니의 병을 고쳐드리려고 그때 나의 동무들이 여러모로 애를 많이 썼다. 나의 친구로서 공청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약을 보내주군 하였다. 신문지상에 나는 광고를 보고 어머니의 병에 좋은 약이라고 짐작되면 값을 따지지 않고 사서 소포로 부치였다. 그런 소포는 길림서도 오고 심양서도 오고 할빈이나 룡정 같은 고장에서도 오군 하였다.

안도지구의 고려의사들도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대사하에 있는 고려의사들은 돈도 받지 않고 어머니를 치료해주었다.

나는 철주의 충혈된 눈빛과 침울한 얼굴표정을 보고 어머니의 병세가 이제는 막다른 대목에 이르렀다는것을 확인할수 있었다. 집에 쌀이 있는가고 동생에게 물으니 그것도 바닥이 났다고 대답하는것이였다.

나는 다음날 소사하에서 동무들이 주는 돈으로 좁쌀 한말(대두 한말)을 사가지고 토기점골로 향하였다. 쌀 한말이면 세식구(어머니, 철주, 영주)가 한달동안은 살수 있을것이고 또 우리도 그만한 시간이면 남만에 갔다올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였다.

대두로 쌀 한말은 15kg가량 되였다. 죽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 그때의 우리 집형편에서 쌀 15kg이면 잔치도 치를수 있는 대단한 량이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한말의 좁쌀이 도무지 성차보이지 않았다. 멜빵이 어깨를 아프게 파고들었지만 나는 도무지 그 쌀짐이 무겁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나에게 기울인 사랑에 비하면 오히려 솜털같이 가볍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전에 아버지한테서 13도창의대장 리린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이 사람이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된 과정을 보면 아주 극적이고 교훈적인데가 있었다. 관동의병장들이 리린영을 자기네 의병부대의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찾아갔을 때 그는 림종직전에 이른 로부의 곁에서 병시중을 들고있었다. 리린영은 그때 의병은 다른 사람이 지휘할수 있으나 부모는 한번 돌아가면 다시 만나뵐수 없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로부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감히 집을 떠난단 말인가, 나는 불효자가 되고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 청을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에야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였다.

전국의 의병들은 앞을 다투어 리린영의 휘하에 모여들었는데 그 수는 무려 8 000명에 달하였다. 얼마후에는 허위, 리강년의 부대까지 합세하여 창의군의 력량은 8 000명으로부터 1만명으로 불어났다. 소총으로 무장한 3 000명의 구한국군도 이에 합류하였다.

전국의 의병장들은 리린영을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진두지휘에 따라 서울로 진격하였다. 서울로 쳐들어가서 일거에 통감부를 격파하고 보호조약을 페기하자는것이 의병의 궁극적인 목적이였다.

이 작전계획에 따라 의병부대들이 서울로 육박하고있을 때 부친상을 당한 리린영은 지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홀연히 고향으로 내려가고말았다. 그의 귀향은 선발대로 나섰던 허위의 패보와 함께 의병의 사기를 저락시키고 부대를 와해에로 몰아넣는 비참한 결과를 빚어내게 하였다.

나는 학생운동을 할 때 길림에서 류길학우회에 망라된 성원들과 함께 부친상을 당한 리린영이 고향에 내려간 문제를 가지고 론쟁을 한적이 있었다.

그때 많은 동무들이 리린영을 쓸개빠진 의병장이라고 비난하였다. 1만명을 통솔하는 의병대장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서울진공이라는 대업을 앞두고 부친상을 당했다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게 무슨 사나이이고 애국자인가고 하면서 막 기염을 토하였다.

하지만 모두가 리린영을 비판만 한것은 아니였다. 개중에는 그를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친상을 당한 사람이 집에 돌아가 상제의 구실을 하는거야 응당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고 하면서 그를 효자라고 추어올리기까지 하였다.

지금은 나라에도 충실하고 부모에게도 효성을 다하는 사람을 효자라고 하지만 그때 당시는 부모들에게 효도를 다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효자라고 하였다.

나는 리린영의 행동은 참된 효자의 표본이 되지 못한다고 론박하였다.

《나라와 가정을 다같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라야 참다운 효자라고 할수 있다. 가정만을 중시하고 나라의 환난을 경시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찌 효자라고 부를수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효성에 대한 유교적가치관을 바로잡을 때가 되였다. 리린영이 만일 자기 책임을 다하여 목적을 성취하고나서 부친의 묘소를 찾아 술이라도 붓고 분향재배하였다면 그의 이름은 후손들앞에서 더 빛을 냈을것이다.》

이것은 봉건도덕과 유교적효성관이 골수에까지 깊숙이 배겨있던 사람들의 낡은 사상에 대고 던진 폭탄과 같은 선언이였다.

류길학우회 성원들은 두패로 갈라져 성주의 말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면서 치렬한 론전을 벌리였다.

지금 우리 사로청원들이나 소년단원들에게 있어서는 론쟁할 여지조차 없는 단순명백한 문제이지만 그때로서는 어느것이 옳다거나 또 어느것이 그르다고 판정하기 어려운 상당히 까다로운 론쟁거리였던것만은 사실이다. 나라와 가정을 다같이 사랑하는것이 진짜배기효성이라는것을 온 나라 인민이 한사람처럼 깨닫고 그것을 신념으로 받아들이기까지에는 실로 수십년의 력사가 필요하였고 피눈물로 얼룩진 체험이 필요하였다.

쌀짐을 지고 토기점골의 집으로 찾아갈 때 나는 새삼스럽게 리린영의 이 일화를 생각하였다. 어째서인지 그 창의대장의 행실이 옳은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지난날 쓸개빠진 의병장이라고 입을 모아 비난하던 그 사람의 행위에서 내가 약간의 정의나마 발견하고 마음속으로나마 그를 동정하고 그에게 약간의 리해를 표시하게 된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사람이 혁명을 한다고 가정을 망각한다는것은 힘든 일이며 그것은 또 있을수도 없는 일이다. 혁명도 인간을 위한것인데 혁명가들이 어떻게 가정을 무시하고 부모처자의 운명에 무심할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가정의 행복과 나라의 운명을 하나의 맥락에서 보아왔다. 나라가 역경에 처하면 가정도 편안할수 없으며 가정에 그늘이 지면 동시에 나라의 표정도 어두워진다는것이 우리의 지론이였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우리는 한 전사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적구에 한개 련대의 병력을 파견하는 전쟁사상 류례없는 조치도 서슴없이 취할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만이 지킬수 있는 의리이고 도덕이였다.

나도 초기에는 이 도덕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감옥에서 나와 동만땅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다음에는 돈화와 안도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저기를 왔다갔다하면서 집에도 종종 들리고 어머니의 병에 도움이 될만 한 약재도 뻔질나게 구해드리였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어머니의 노여움을 사게 되였다. 내가 집에 드나드는 회수가 잦아지게 되자 어머니는 어느날 나를 앉혀놓고 이렇게 타이르는것이였다.

《네가 혁명을 하려거든 혁명에 전심하고 세간살이를 하려거든 세간살이에 전심하고 량자간에 어느 하나를 택하거라. 내 생각 같아서는 집에 철주도 있고 우리들끼리 벌어먹을수 있으니 너는 집근심일랑 하지 말고 혁명에만 전념하는것이 좋겠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은 다음부터 집으로 다니는 회수를 줄이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한 후에는 거의나 집에 드나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후회되였다. 어머니가 경계하더라도 나로서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했어야 했을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아팠다. 가정에도 충실하고 나라에도 충실한다는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였다.

토기점골이 가까와질수록 내 걸음은 어쩔수없이 빨라졌다. 그대신 마음은 각일각으로 무거워졌다. 중환에 계신 어머니의 모습을 뵙게 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산란해졌다.

물웅뎅이에는 갈대가 벌써 퍼그나 자라 바람에 흐느적이고있었다. 갈이 많아서 이 고장을 갈밭마을이라고 했었는데 아래촌에 사는 김병일네가 몇해전부터 토기를 구워 팔면서부터 이 한적한 심심벽촌도 천지개벽을 하여 토기점골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나는 통나무를 가로질러놓은 다리를 건너 웃마을로 올라갔다. 낯익은 초가가 어느새 내 눈에 비쳐들었다. 엉성한 싸리바자도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벼짚이영도 제때에 갈지를 않아 페가와 같이 한산해보이는 집, 그것이 바로 몇해째 남정의 손이 닿아본적이 없는 우리 집이였다.

삽짝문을 열고 뜨락에 들어설듯말듯 하는데 방문이 급하게 벌떡 열리였다.

《어머니!》

나는 문설주에 기대앉아 웃고계시는 어머니앞으로 총총히 다가가며 소리쳐 불렀다.

《글쎄 내 아무래두 발자국소리가 귀에 익다 했지.》

어머니는 토방우에 벗어놓은 쌀자루의 멜빵을 만지며 반가와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집출입이 잦다고 꾸중을 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나무람은 없었다.

어머니와 나사이에는 얼마동안 문안이야기가 오고갔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어머니의 안색이며 음성이며 몸가짐이며를 순간순간마다 살피면서 건강상태를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외형으로 보아서는 지난겨울과 별로 달라진것이 없었는데 기력은 흠뻑 줄어들었다는것이 알리였다. 팽팽하던 가슴도 훌쭉해지고 목도 가늘어지고 귀밑머리에는 흰오리마저 눈에 뜨일만치 섞여있어 어쩌면 세월이 이렇게도 일찍 우리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겨운 흔적을 낼수 있을가 하는 서글픈 마음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그날 밤 어머니와 함께 자정이 넘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군대가 어데까지 들어왔는가, 유격대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 량세봉선생과는 어떻게 손을 잡으려고 하는가, 근거지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두서없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어머니는 화제를 자꾸만 정치문제에로만 유도하였다. 집안살림이나 자신의 병세가 화제에 오르면 얼른 매듭을 지어버리고 다른 문제를 꺼내여 내가 거기에 끌려가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아들에게 병을 숨긴다는것은 어머니자신이 그만큼 중태에 빠져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라고 나는 판단하였다. 어머니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륙감적인 판단은 나로 하여금 등골에 찬물이 흐르는것과 같은 전률을 느끼게 하였으며 남모르는 눈물을 삼키게 하였다.

다음날 나는 아침밥을 일찍 해먹고 철주동생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나무를 하려는것이였다. 집둘레를 돌아보니 땔나무도 한두단밖에 보이지 않았다. 집에 들린 기회에 나무라도 몇짐 해놓고가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욕심 같아서는 손을 댄김에 몇달분의 화목을 해놓고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산이 깊지 않다보니 강대도 칠것이 없어 부득불 쉬나무를 베지 않으면 안되였다.

《철주야, 이런것 말구 더 분한이 있는게 없겠니?》

내가 이렇게 묻자 동생은 무명잠뱅이를 추어올리며 대답하였다.

《아무거나 한짐 해가지고 내려가자요. 어머니가 알면 꾸중하시겠어요.》

겉보기에는 철부지같았는데 벌써 철이 다 들었다.

철주는 낫질을 하면서도 연송 초조하게 마을쪽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몰래 나무를 하러 왔는데 낌새를 채면 어쩌나 하는 눈치였다. 내가 집안일에 잔신경을 쓰면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는다는것을 그도 알고있었다.

나는 쉬나무가지를 휘여잡으며 손에서 불이 일게 낫질을 하였다.

우리는 해가 질무렵에야 지게에 나무단을 올려놓고 마을로 내려왔다. 갈밭이 내려다보이는 굽인돌이에 나서자 마당끝에 서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띄웠다.

나는 작시미를 짚고 산길을 내리면서도 줄곧 무거운 상념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중환에 계시는 어머니를 두고 원정을 떠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질것 같았고 앞길이 막막해보이였다. 우리는 원정의 기한을 한두달로 정하였지만 그 한두달사이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고 부대의 행로가 어떻게 될지 그것은 누구도 예측할수 없는것이였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전처럼 몇해 더 지하투쟁을 하면 어떨가, 그렇게 하면서 몇달에 한번씩 집에 들려 가정사도 의논하고 어머니를 위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는것이 한뉘 고생속에서 살아오시였고 남달리 심리적고통도 많이 겪어오신 어머니를 위해 내가 자식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겠는가, 할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가신지 얼마 안되는 때에 나마저 이 안도땅을 훌쩍 떠나고나면 허전하고 의지할데가 없어 병약한 어머니가 어떻게 견디여내시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나 일개인 가정문제때문에 유격대의 한해 활동방침으로 이미 설정해놓은 남만원정계획을 취소할수도 없지 않는가.

《아니, 이 산에서 땔나무가 없을가봐 걱정이 돼서 그러느냐?》

사립문가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어머니가 문득 언짢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대신 웃음을 짓고 땀을 씻으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차츰 네가 이상해진다. 무송에 있을 때두 그렇지 않았구 저너머 흥륭촌에 있을적에두 그런줄 몰랐는데 요새는 집걱정이 늘어났으니 말이다.》

어머니의 음성은 갈려있었다.

《오래간만에 풀냄새를 맡으니 가슴이 후련해지는구만요.》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못들은체 하고 천연스럽게 뜨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날 저녁 우리는 오래간만에 네식구가 한상에 둘러앉았다. 접시우에는 버들치구이도 놓여있었다. 그 버들치구이가 별맛이였다. 어데서 생긴 찬이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막내동생이 형이 오면 상우에 놓을 찔게가 없어 야단이라고 걱정하던 끝에 낚시질을 해서 처마밑에 꿰미채로 걸어 말린것이라고 하였다. 손가락만큼한것이 한접시였는데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 다 없애지 못하고 몇마리 남기였다.

막내동생이 잠든 다음 어머니는 비스듬히 벽에 기대였던 상체를 일으켜세우고 심각한 어조로 나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보니 너는 이전보다 좀 달라졌다. 네가 쌀자루까지 지고다니며 어머니를 부양하게 될줄을 나는 몰랐다. 앓고있는 이 에미걱정때문이겠지. 너의 효성이 지극하니 고맙기는 하다만 그만한것으로 위안을 받을 내가 아니다. 부녀회를 늘이려고 무송에서랑 네 손목을 잡고 험한 령을 넘어다닐 때에 오늘 이런 위안이나 받자구 그랬겠느냐? 너에게는 더 큰 일이 있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야 하지 않겠니.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조선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내 걱정은 말구 어서 네 갈길이나 빨리 가거라.》

어머니의 말마디들은 격정으로 떨리였다.

내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 어머니는 입술을 사려문채 다음 말을 잇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인생관이 마디마다 집약되여 그것이 나의 온 심혼을 폭풍처럼 흔들어놓으며 페부에 깊숙이 새겨지는 천금같은 순간이였다.

어머니는 잠시 숨을 돌리고나서 말씀을 이었다.

《나무를 한다는것도 그렇다. 네가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 어머니나 동생들이 없었던셈치고 집걱정은 아예 말아라. 네가 집을 떠나서 혁명사업을 잘하면 내 병이 다 나을수도 있다. 그러니 너는 부대를 데리구 곧 떠나거라. 그것이 내 소원이다.》

나는 즉석에서 대답을 올리였다.

《어머니의 뜻을 명심하겠습니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래일은 소사하로 갔다가 부대를 데리구 남만으로, 량세봉선생한테로 곧 떠나겠습니다.》

나는 눈물이 콱 쏟아져나와 벽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말았다.

어머니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구석쪽에 놓인 반짇고리를 끌어당겨 나의 군복저고리에 단추를 달기 시작하였다.

내 눈앞에는 어째서인지 아버지의 장례식때에 체험했던 일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는 상복도 입지 않고 아버지의 묘소에도 가지 않았다. 우리 삼형제에게만 상복을 입혀서 장례에 내보냈다. 오동진, 장철호, 량세봉을 위시한 독립군들이 우리 삼촌과 함께 수십명 령구를 따라갔지만 어머니만은 묘지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되여 오월단오가 되였는데 그때 우리는 어머니보고 산소에 같이 가자고 졸랐다.

어머니는 나야 거기 가서 뭘하겠니. 너희들끼리나 가라고 하면서 끝내 산소에 가지 않았다. 그대신 우리에게 제물을 꾸려주고는 향불은 어떻게 피우고 술은 어떻게 부으며 절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것을 차근차근 대주었다. 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산소에 가지 않은것은 자식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묘지에 혼자서 가군 하였다. 그 관례를 깨뜨린것은 단 한번, 리관린이 장례에 참가하지 못하고 뒤늦게 무송에 나타나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을 때뿐이였다. 그때 어머니는 리관린을 묘지에까지 안내하였는데 그가 너무 슬프게 조상을 하던 나머지 기절할 지경이 되였기때문에 오히려 울지 말라고 달래기까지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이처럼 인정에 무른분이였지만 눈물이 없었다. 녀성으로서는 실로 드물다고 할만치 강의한 성품을 지니고있었다. 어린시절에 목격한 어머니의 놀라운 천품이 나의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인상으로 남아있다.

이런 어머니였기때문에 그처럼 쓸쓸한 병상의 고독속에서도 서슴없이 아들이 갈길을 재촉할수 있었고 아들에게 매를 대는 심정으로 온몸과 넋이 짜릿짜릿하게 한생의 좌우명으로 되는 심각한 훈계의 말씀을 해줄수 있었던것이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보통어머니가 아니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늘 마동희의 어머니 장길부녀사를 보통어머니가 아니라고 평가하는 리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어머니가 해방후 나를 만났다. 그런데 그분은 울지 않았다. 다른 녀자들은 만나서 다 울었지만 그 어머니만은 울지 않았다. 내가 아들의 전우들이 많은 평양에서 살라고 했더니 장길부어머니는 아들을 고발한 원쑤들을 찾아내야겠다고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고향으로 내려갔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밖으로 나갔다. 찌그러진 싸리바자앞에서 찬공기를 쐬며 거닐고있는데 철주가 조용히 문을 열고 토방에 나섰다.

우리는 둘이서 나무단을 깔고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철주는 지금까지 공청사업에만 열중하다보니 어머니를 잘 돌봐드리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형이 집걱정을 하지 않도록 처신을 잘하겠노라고 하였다. 사실은 내자신도 그런 부탁을 하고싶었는데 동생이 먼저 말을 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우리는 콩비지를 맛있게 해먹었다. 나는 밥상을 물리고나서 뒤집에 있는 김정룡이를 만나러 찾아갔다. 동생들의 운명문제를 의논하고싶어서였다.

내가 남만으로 당장 떠나가야겠는데 집일이 걱정되여 토기점골에서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실토했더니 김정룡은 집일은 다 나한테 맡기고 떠나라, 내가 다 책임지겠다, 동생들도 돌보고 어머니의 병구완도 잘할테니 념려말라고 하였다.

나는 집에 나와 길떠날 차비를 하였다.

내가 신발끈을 매고있을 때 어머니는 고리짝밑에서 5원짜리 지전 넉장을 꺼내여 나에게 주었다.

《객지생활을 하느라면 돈을 써야 할 때가 많겠는데 이걸 건사해라. 남자의 주머니에는 정 급할 때 쓸 돈이 있어야 한다. 청나라말기에 손중산선생이 외국대사관 감옥에 갇혔을 때에두 소제부한테 돈을 몇잎 쥐여주고 빠진 일이 있었다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지 않더냐.》

정작 돈을 받아들었지만 손이 떨려서 주머니에 집어넣지 못하고 어떻게 할바를 몰라 망설이였다. 그 돈 20원에 얼마나 큰 어머니의 로고가 깃들어있는가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손가락끝이 모지라지도록 삯빨래도 하고 삯바느질도 해서 푼푼이 저축해둔 20원의 돈, 소 한짝에 한 50원정도씩 할 때였으니 그만한 돈이면 중소 한마리는 살수도 있었고 쌀을 사서 세식구가 일년은 살아갈수도 있었다.

나는 마치 그 돈의 무게때문에 몸의 균형을 잃기나 한것처럼 비척거리면서 토방밑에 내려선 다음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고개를 숙여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순간에 내가 명심한것은 나의 인사가 다른 때와 류다른 점이 있어서 어머니를 울리게 해서는 안되겠다는것이였다. 그래서 될수록 표가 나지 않게 보통때와 다름없이 범상하게 인사를 하였다.

《어서 떠나거라. 아무래도 갈길인데.》

어머니는 병색이 짙은 얼굴에 미소를 애써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내가 걸음을 내디디였을 때 뒤에서 방문 닫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걸음을 내짚었다. 그러나 나의 걸음은 동구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둘레를 돌기 시작하였다. 손에는 돈 20원이 그대로 쥐여져있었다. 한바퀴를 돌고 두바퀴를 돌고 세바퀴를 돌고…

그 길지 않은 시간에 내 머리에는 온밤 내 마음을 휘여잡고 놓아주지 않던 복잡한 상념의 쪼각들이 구름처럼 피여올랐다. 내가 이 마당에 다시 들어서게 되는 날은 언제쯤 될가? 과연 내가 지금 승산이 내다보이는 길을 가려고 하는가? 내가 가는 앞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있을것인가? 그사이 어머니의 병이 호전될 가망은 있을가?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겨 집둘레를 속절없이 돌고있을 때 어머니가 문을 열어제끼며 준렬하게 나를 꾸짖는것이였다.

《상기두 무엇이 걱정돼서 그렇게 떠나지 못하구 우물쭈물하느냐? 나라를 찾겠다구 결심품구 나선 사람이 그렇게도 마음이 예리고 집걱정이 많아서야 어떻게 대사를 치르겠니. 너는 집안일을 걱정하기전에 먼저 감옥에 계시는 삼촌을 생각하구 외삼촌을 생각해야 한다. 빼앗긴 나라를 생각하구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 왜놈들이 나라를 강탈한지도 벌써 스물두해가 되여오는데 너두 조선의 사내라면 맘을 크게 먹구 걸음을 크게 떼야 할게 아니냐. 네가 장차로도 이 에미걱정때문에 집으로 찾아올 생각이라면 아예 이 문앞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아들은 만나지 않겠다.》

어머니의 말씀은 마치 천둥소리처럼 내 가슴을 세차게 울리였다.

어머니는 그 몇마디의 말씀에 기력을 다 소모해버린것처럼 문설주에 머리를 기대고 정과 열과 노여움이 엇바뀌는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계시였다. 어쩌면 천리를 걸어 팔도구에 도착한 날 밤 하루도 재우지 않고 그달음으로 림강에 가라고 떠밀어보내던 때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그런 모습같기도 하였다.

나는 아들로서 그처럼 의에 불타고 열로 빛나는 강직하고 숭고한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어머니는 온몸에 불붙는 그 의와 열로 하여 순식간에 재가 될것 같은 형상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에 대하여 잘 알고있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개와 넋은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할 그런 경지에서 나를 굽어보고있었다.

그때의 모습은 차라리 어머니라기보다도 스승에 가까운 모습이였다.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 고마운 어머니를 모시고있다는 자랑으로 하여 나는 가슴이 터져나갈것만 같은 행복감을 느끼였다.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깊숙이 숙이였다. 그런 다음 동구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아래목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느고나서 고개를 돌리니 흰옷을 입은 어머니가 문설주를 짚고 나를 지켜보고계시였다. 그것이 내 눈에 비쳐든  어머니의 마지막모습이였다. 저 섬약한 육체의 어느 구석에 이 아들의 가슴을 그렇게도 드세게 흔들어준 고결하고 강의한 넋이 깃들어있을가. 저렇게 훌륭한 어머니의 몸이 병마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이 아들은 지금 얼마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고있겠는가.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십수백번 체험하게 되는 그런 범상한 작별이 아니라 내 한생에 가슴아픈 추억을 남겨놓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영별이였다. 나는 그후로 어머니를 다시 만나뵙지 못했다.

몇달이 지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였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머리에 맨 처음으로 떠오른것은 마지막작별의 순간에 더 따뜻한 말을 해드리지 못한 회한의 감정이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런 감상적인 리별은 바라지 않았으니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은것만은 사실이였다.

고령이 된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하고있다.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적어도 몇번씩은 그런 대목에 서게 되는 법이다. 그때마다 종이장두께의 미세한 차이로 인해 사람들의 운명에서는 엄청난 편차가 생기게 되며 그 종착점은 서로 다른 극에 이르게 된다. 그때 어머니가 내앞에서 집걱정을 하였거나 내 마음의 탕개를 늦추는 말씀을 단 한마디라도 하였더라면 깃을 펴고 대공으로 날을 차비를 하던 이 아들의 심중에서는 어떤 파문이 일었을가.

청소한 반일인민유격대의 대오를 이끌고 소사하등판을 떠난 그때로부터 나는 전우들과 함께 수십년동안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혈전의 길, 혹한의 길, 기아의 길을 걸어왔다. 그후에는 사회주의기치를 들고 창조와 건설의 반세기를 헤쳐왔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그 준엄하고도 시련에 찬 길에서 혁명가의 신념을 검열하는 그런 곡경에 처할 때마다 나는 그 어떤 리념이나 철학적명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를 남만으로 떠밀어보내면서 어머니가 하던 말씀과 흰옷을 입고 나를 바래주던 어머니의 마지막모습을 회고하며 의지를 가다듬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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