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0, 2024
KCNA DPRK Today (Kr)

제4장 4. 첫 당조직-건설동지사​

Date: 19/06/2021 | Source: DPRK Today (Kr) | Read original version at source

4. 첫 당조직-건설동지사

카륜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1930년 7월 3일 우리가 새형의 당조직을 내온 사실은 여러해전에 공개되였고 그 모임에서 한 나의 연설도 이미 세상에 나갔다.

당이 혁명에서 참모부의 역할을 수행하며 당의 역할에 따라 혁명의 승패가 좌우된다는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혁명이 력사의 기관차라면 당은 혁명의 기관차라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당을 중시하고 당을 꾸리는 일에 그처럼 큰 심혈을 기울이는것이다.

맑스가 과학적공산주의리론을 창시한 후 실천투쟁의 첫 사업으로 공산주의자동맹을 창건하고 《공산당선언》을 발표한것이 그의 활동에서 가장 큰 공적으로 오늘까지도 찬양되고있는것은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당이 노는 사명과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지기때문인것이다.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로동운동상에서 나타났던 여러가지 류형의 기회주의, 개량주의도 구경은 당에 대한 견해와 립장이 그릇된데서 발생된다고 말할수 있다.

공산주의가 새로운 시대사조로서 로동운동무대에 출현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지구상에서 이룩해놓은 모든 세기적변혁들은 그 어느것이나 다 당이라는 신성한 이름과 련결되지 않는것이 없다.

우리는 카륜회의에서 내세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먼저 당조직을 내오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리가 새형의 당을 창건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그 방도를 전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것은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서 제명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우리 나라에서 공산당이 조직된것은 1925년 4월이였다. 각국에서 로동계급의 리익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속속 출현하여 대중을 이끌던 세계적추세에 발을 맞추어 정치적활동의 자유와 권리의 불모지였던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정당이 창건되였다는 사실은 새 사조와 시대적추세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정치적감수성이 얼마나 민감하고 풍부하였는가를 실증해준다.

조선공산당의 창건은 조선로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발전의 필연적귀결이며 합법칙적산물이였다.

조선공산당은 창건후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대중속에 사회주의사상을 보급하고 로동운동을 령도하여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령도되는 새로운 페지를 열어놓았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기간 6.10만세시위투쟁과 같은 큰 규모의 투쟁을 지도하여 민족의 기개를 과시하였으며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으로 신간회와 같은 대중단체도 만들어 반일애국력량을 집결시키는 사업에도 이바지하였다.

조선공산당이 창건되고 그 령도밑에서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대중운동이 전개된것은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의 시초를 열어놓은 하나의 력사적사변으로서 민족해방운동발전을 일정하게 추동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상층인물들의 파쟁으로 하여 1928년에 조직된 력량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였다.

국제공산당에서는 1928년 여름에 있은 제6차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조선공산당이 국제당대렬에서 제명되였음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물론 우리는 조선공산당이 존재할 때에도 파쟁을 일삼는 그 상층부에 대하여서는 시답지 않게 여기였다. 그러나 그 당마저 국제당대렬에서 제명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분하고 수치스러운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우리는 그때 국제공산당의 처사에 대하여 야속하게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비록 나이도 어리고 공산주의운동경험도 적지만 우리자신이 주인이 되여 새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순결하고 참신한 새형의 당을 창건하자면 여러가지 장애와 난관을 타개해야 하였다.

가장 큰 난점은 공산주의대렬안에 종파주의가 의연히 남아있는것이였다. 종파주의가 청산되지 못하였기때문에 초기공산주의자들은 당재건운동도 통일적으로 하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분렬된 상태에서 파벌별로 하였다.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서 제명처분을 받은 후 우리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국내외에서 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을 치렬하게 벌리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차별적인 탄압과 방해책동으로 어느 파벌도 재건에 성공할수 없었다. 화요파와 엠엘파가 재건운동을 포기하고 만주지방에 조직되여있는 총국을 해체한다고 선언한 후 서상파가 국내에서 재건바람을 일으켰지만 그것마저 로출되여 많은 당원들이 감옥에 끌려가는것으로 막을 내리고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해산된 당을 재건하거나 파쟁의 악습에 물젖은 기성세대에 의거해가지고서는 혁명적당을 창건할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였다.

당을 창건하는데서 제기되였던 다른 하나의 난관은 국제공산당이 제정한 1국1당제원칙에 의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만주지방에서 독자적인 당을 창건하는것이 불가능한 일로 된것이였다.

국제당은 제6차대회에서 채택한 규약의 총칙에서도 국제공산당에 소속되는 개개의 당은 해당 나라의 공산당(국제공산당지부)이라는 명칭을 가지며 매개 나라에서는 하나의 공산당만이 국제당의 지부로서 존재할수 있다는 1국1당제의 원칙을 규정하였다.

국제공산당 동양선전부에서는 1930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중공산당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조선공산당조직문제에 대한 국제당의 결정을 통지해주었다. 국제당은 그 결정에서 재만조선인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당에 가입하여 중국당원으로서 활동할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되여 재건운동에 열을 올리던 공산주의자들속에서 태도를 바꾸어 해체성명을 발표하고 중국당에 전당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으며 그 바람을 타고 5. 30폭동의 불길이 동만을 휩쓸게 되였다.

조선당원이 중국당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문제는 민족적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에게 심각한 자극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이 원칙을 놓고 우리 동무들은 열기띤 론쟁을 벌리였다. 국제당의 지령을 무책임한 처사, 리해할수 없는 결정이라고 비난하는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조치를 공명정대한것으로 평가하는 청년들도 있었으며 국제당이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당가입을 요구하는것은 당재건의 가능성을 영영 배제하는것으로 된다고 하면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울화를 터뜨리는 청년들도 있었다.

우리 동무들은 이 문제를 화제에 올리고 나의 립장을 알고싶어하였다.

나는 국제당이 1국1당제원칙에 따라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중국당가입을 요구하는것은 비난받을 처사가 아니며 그 요구가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서 당재건의 가능성을 박탈하는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명백히 말해주었다.

《현재의 형편에서 국제당의 요구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것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기의 독자적인 정당이 있다면 구태여 무엇때문에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라고 요구하겠는가. 그러니 국제당의 결정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국제주의적립장이다. 중국당원의 모자를 써도 조선을 잊지 않고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면 된다. 그러나 국제당의 지시대로 한다고 하여 독자적인 당건설을 단념하고 무한정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할수는 없다.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의 당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전당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였고 립장이였다.

그러나 그 견해가 1국1당제원칙에 대한 국제당의 해석과 일치한다고 장담할수는 없었다.

나는 1국1당제원칙에 대한 리해를 심화시키고 당건설방침을 하루속히 확정하기 위하여 1930년 6월 하순에 쟈쟈툰에서 국제공산당 련락원 김광렬(김렬)을 만나보았다. 김광렬은 일본에서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쏘련에 가있다가 나온 인테리였는데 우리의 활동구역인 고유수, 오가자, 카륜지방에 많이 와있었다. 련락원의 신분을 가지고 우리와 국제당과의 련계를 지어주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쏘련에서 사회주의물을 많이 먹다가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장소봉과 리종락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기때문에 나도 기대를 가지고 그를 만나보았다. 만나고보니 소문과 같이 박식한 사람이였다. 그는 로어와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였고 쏘련춤도 그 나라 사람들 못지 않게 잘 추었으며 연설도 잘하였다. 그때 김광렬은 나에게 자기의 개인적인 견해를 듣기보다는 국제당에 가보라, 국제당 할빈련락소에 소개해줄터이니 거기에 가서 1국1당제원칙에 대하여 토론해보라고 하였다.

김광렬을 만난 후 나는 동무들과 함께 1국1당제원칙에 대한 론쟁을 거듭하였다.

우리는 1국1당제원칙의 요구를 한 나라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공산당이 국제당에 가입할수 없고 오직 하나의 공산당만이 가입할수 있다는것, 한나라에는 한개이상의 공산당중앙이 존재할수 없고 하나의 공산당중앙만이 존재할수 있다는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원칙의 본질은 한 나라에 같은 리해관계와 목적을 가진 당중앙이 하나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국제당이 1국1당제원칙을 내놓고 그것을 엄격히 리행하도록 요구한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종파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를 청산하고 대렬의 통일단결을 보장하자는데 기본목적이 있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력사적교훈은 국제공산당으로 하여금 1국1당제원칙을 내세우고 공산주의운동내에 여러가지 이색적인 요소들이 침습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하게 하였다.

국제공산당이 1국1당제원칙을 명시하게 된것은 또한 적들이 공산주의대렬을 내부로부터 분렬와해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한것과도 관련된다.

그런데 국제공산당규약은 1국1당제의 원칙만 제시했을뿐 다른 나라에 가서 공산주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재국의 당에 전당하는 방법은 어떻고 전당후 그들의 혁명임무를 어떻게 설정하겠는가 하는것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만주지방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당에 전당하는 문제가 그처럼 복잡한 론의를 불러일으킨것도 바로 그때문이였다. 이런 리유로 하여 일부 사람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땅에서 자체의 당조직을 꾸리는것이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된다고까지 판단하게 되였던것이다.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대한 각이한 해석으로 하여 조국의 해방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엄청난 혼란과 동요가 빚어지고 조선의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조국을 위해 싸울 권리조차 의문시되고있던 그런 시기에 나는 당을 창건하기 위한 방도를 꾸준히 모색하고있었다.

국제당의 지시에도 부합되고 조선혁명도 강력히 추진시킬수 있는 그런 길이 과연 없단 말인가.

이런 모색끝에 내가 찾아낸 출로가 바로 선행공산주의운동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조급하게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당창건의 조직사상적기초를 착실하게 다지고 그 토대우에서 명실공히 우리 혁명의 참모부적역할을 수행할수 있는 당을 창건하자는것이였다. 계급적으로 각성되고 준비된 조직적골간의 육성과 대렬의 사상의지적통일, 당이 의거할수 있는 군중적지반의 구축이 없이 주관적욕망만으로는 당을 창건할수 없었다.

나는 종파와 인연이 없는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을 골간으로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는것이 우리앞에 주어진 가장 적합하고 현실적인 창당방법이라고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면 국제당에서도 환영할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키워온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로 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 역할을 부단히 높여나가면서 우리의 발길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기층당조직을 확대강화해나간다면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도도 능히 보장하고 우리에게 지워진 국제적임무도 원만히 리행해나갈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국땅안에서 우리의 당중앙을 따로 내와가지고 중국당과 병존하지 않는다면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도 모순될것이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정립하여 카륜회의에서 당창건방침을 제시하고 첫 당조직을 내오게 되였다.

혁명적당조직을 결성하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연적요구이기도 하였다.

조선에 당이 없으니 단천농민폭동 지도자들은 폭동의 전술적문제에 대한 의견을 받기 위하여 국제당에까지 찾아다니였다. 조선에 로동자, 농민의 리익을 대변하는 혁명적당이 있고 세련된 지도력량이 있었다면 그들이 로자를 쓰면서까지 국제당에 찾아다니지 않았을것이다.

1930년대 초엽의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은 그 폭과 심도에 있어서 종전의 반일투쟁과는 대비도 할수 없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우리의 투쟁도 초기보다는 비할바없이 전진하였다. 활동범위는 길림을 벗어나 멀리 동만과 북부조선일대에까지 확대되였다. 청년학생운동에 머물러있던 우리의 혁명투쟁은 지하활동의 양상을 띠고 광범한 로동자, 농민대중속으로 줄을 뻗치였다. 경험이 축적되고 군사정치적준비가 성숙되면 상비적인 혁명군대를 조직해가지고 대부대력량으로 본격적인 유격전쟁을 해야겠는데 공청이 그 령도를 다 감당할수는 없었다. 지난날 공청이 여러 대중단체들을 지도한것은 과도적인 현상이였지 영구적인것은 아니였다.

이제는 당을 만들어 그 당이 공청을 비롯한 여러 대중단체들을 장악지도하고 민족해방운동전반을 령도하며 중국당과의 관계도 가지고 국제당과의 사업도 해야 하였다. 공청의 간판을 가지고서는 국제당과의 거래도 원만히 할수 없었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이 저마다 자기 파를 《정통파》로 자처하면서 승인을 받으러 다녔기때문에 국제당에서도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국제당은 조선에서 종파가 청산되기 전에는 진정한 로동계급의 전위대가 나올수 없으며 종파를 근절하고 새로운 당을 창건하기 위해서는 파쟁도 모르고 집권욕도 없는 새 세대가 나서야 한다는것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의 투쟁에 주의를 돌리였으며 우리와 손을 잡아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줄을 놓았다.

우리는 여러해동안의 혁명활동과정을 통하여 새형의 혁명적당조직을 내올수 있는 초석도 쌓아놓았다.

《ㅌ. ㄷ》의 결성은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형의 혁명적당창건을 위한 출발점으로 되였다. 모든것이 《ㅌ. ㄷ》로부터 시작되였다. 《ㅌ. ㄷ》가 발전하여 반제청년동맹으로 되고 공청으로 되였다.

공청이 키워낸 우리 혁명의 핵심부대, 반제청년동맹이 이루어놓은 우리 혁명의 대중적지반이 곧 당창건의 기초로 되였다. 공청이 창립되고 그것이 강력한 전위조직으로 혁명운동을 령솔하던 나날에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선행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범하였던 오유들을 극복하고 대중전취와 령도예술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새세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발양된 영웅적인 투쟁정신과 혁명적인 투쟁기풍은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을 타승한 원동력으로 되였으며 후날 우리 당의 넋으로 되고 기개로 되였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는것은 카륜회의를 계기로 하여 조선혁명의 지도사상을 정립해놓은것이였다. 카륜회의결정에는 《ㅌ. ㄷ》와 공청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길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원칙으로 삼아야 할 전략들이 명시되여있었다. 그것은 새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사상적기초로 되였으며 실패와 좌절의 진통속에서 오래동안 갈길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상 지침으로 되였다.

지도사상, 령도핵심, 군중지반, 이것은 당조직을 내오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요소라고 할수 있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다 갖추고있었다.

우리는 1930년 7월 3일 카륜의 진명학교 교실에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동무들로 첫 당조직을 무었다.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김리갑, 김형권, 박근원, 리제우동무들도 첫 당조직 성원으로 되였으며 조선혁명군 대장으로 내정되여있던 리종락과 박차석도 이 조직의 성원으로 되였다.

진명학교는 마을에서 500m가량 떨어진 쟈쟈툰 앞벌에 있었다. 학교의 동쪽과 남쪽에는 5~6정보가량 되는 개버들밭이 펼쳐져있었고 버들밭가운데로는 무개하라는 큰 개울이 동남방향으로 흐르면서 학교를 에워싸고있었다. 학교동쪽에서부터 마을까지는 늪과 진펄이였다. 진명학교로 오갈수 있는 통로는 오직 서쪽밖에 없었다. 길목에서 경비만 잘 서주면 학교에서 무슨 일을 해도 모르게 되여있었으며 설사 위험이 조성되는 경우에도 개버들밭으로 빠지면 종적을 찾을수 없게 되여있었다.

그날밤 우리는 밀정들이 나타날수 있는 서쪽관문에 2중3중의 보초를 세우고 회의를 하였다. 논벌에서 개구리들이 소란스럽게 울어대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개구리소리가 신비스러운 정서를 자아냈다.

첫 당조직을 내올 때의 인상가운데서 잊혀지지 않는것은 김원우가 회의장을 꾸리면서 연탁옆에 붉은기를 세우느라고 애쓰던 일이다. 그 기발의 붉은 색조는 혁명을 위해서 마지막 피 한방울이 다할 때까지 싸우려는 우리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었다.

지금도 첫 당조직 하면 진명학교를 생각하게 되고 진명학교를 생각하면 연탁옆에 비스듬히 서있던 그 잊지 못할 기발을 그려보게 된다.

나는 그날 연설을 길게 하지 않았다. 첫 당조직을 내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카륜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 론의를 거듭했기때문에 구구하게 그 취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당조직성원들이 해야 할 과업으로 기층당조직을 확대하고 그에 대한 통일적지도체계를 수립할데 대한 문제, 대오의 조직사상적통일과 동지적단합을 확고히 이룩할데 대한 문제, 혁명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다질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실현방도로서 당조직이 모든 활동에서 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할데 대해서와 당조직건설사업을 반일투쟁과 밀접히 결부시킬데 대하여 강조하였을뿐이였다.

우리는 당강령과 규약을 따로 채택하지 않았다. 《ㅌ. ㄷ》의 강령규약에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최종목표와 당면투쟁과업이 명백히 밝혀져있었고 카륜회의에서 채택된 혁명로선과 전략적방침들에 우리가 가야 할 길과 행동규범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여있었다.

그후 우리는 첫 당조직에 건설동지사라는 소박한 명칭을 붙이였다. 그 명칭은 동지를 얻는것으로부터 혁명의 첫걸음을 떼였고 생사를 같이할수 있는 동지들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결속시켜 혁명을 심화발전시키며 종국적인 승리를 달성하려는 우리의 포부와 의지를 그대로 담고있었다.

건설동지사에 가입한 동무들은 모두가 일어나서 격정에 넘치는 열변을 토하였다. 김혁은 그때 《출범이다. 우리의 배는 항구를 떠났다. 우리는 격랑을 헤치며 먼바다로 노를 저어간다.》는 내용으로 즉흥시를 읊었다.

김혁의 시랑송이 끝난 다음 최효일이 일어나서 일장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을 마치자 이렇게 말했다.

《성주, 여기가 교실이 아니고 산중이라면 기념으로 례총을 쏘고싶소!》

나는 일본놈들과 대결할 날도 멀지 않으니 그때가 되면 실컷 총을 쏘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때 첫 당조직의 결성을 기념하여 권총이 아니라 대포라도 쏘고싶은 심정이였다. 자기의 당조직을 가지고 조선의 당원으로 시대와 력사앞에서 혁명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엄숙히 선서한 우리의 기쁨과 자부심은 참으로 말이나 글로써는 다 표현할수 없었다.

15년후 해방된 조국에서 당을 창건하고 어린시절의 체취가 그대로 스며있는 고향집 온돌방에 멍석을 깔고 누웠을 때 나는 만가지 시름을 다 털어버리고 카륜에서 첫 당조직을 내오던 때의 일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첫 당조직-건설동지사는 우리 당의 태아였고 씨앗이였으며 당의 기층조직들을 내오고 확대하는데서 모체적의의를 가지는 조직이였다. 첫 당조직을 가지게 된 때로부터 우리 혁명은 종파의 물을 먹지 않은 백지장같이 깨끗하고 참신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령도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여왔다. 자주적인 당건설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이때로부터 항일대전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줄기차게 진척되였다.

그후 우리는 건설동지사 성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두만강연안의 북부조선일대와 만주의 여러 지역에 당조직들을 내왔다.

국내에 당조직들을 내오는 일은 내가 맡아하였다. 나는 1930년 가을에 우리의 영향이 비교적 강하게 미치고있던 함경북도 온성군에 나가 국내당조직을 무었다.

우리의 청소한 당조직들은 인민대중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언제나 그들의 선두에서 항일전쟁의 진군로를 헤쳤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강철의 전위대오로 단련되고 군중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임을 받는 불패의 력량으로 자라났다.

우리는 자기의 독자적인 조직을 가지고 활동하면서도 중국당과의 밀접한 련관속에서 사업하였다. 우리는 조선의 공산주의자이지만 조중 두 민족의 유구한 선린관계와 두 나라가 처한 처지의 류사성, 두 나라 혁명가들이 짊어지고있는 시대적사명의 공통성으로부터 시종일관 중국혁명을 지지해주었으며 중국당과 중국인민의 리익을 옹호하여 싸웠다. 중국당과 중국인민이 자기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거듭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제 일처럼 기뻐하였으며 그들이 일시적인 실패와 곡절을 겪을 때면 그들과 함께 가슴아파하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땅에서 활동하는 이상 중국당과 련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중국인민의 방조를 받을수 없었으며 반제공동전선을 튼튼히 유지해나갈수 없었다.

우리가 중국당과의 련계를 중시한것은 만주성위산하의 당조직들에 조선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정과도 관련된다. 동만특위에도 조선사람들이 많이 들어가있었고 동만지역의 현당위원회와 구당위원회 지도부도 절대다수가 조선사람으로 이루어져있었으며 당원비률에 있어서도 90%이상이 조선사람들이였다. 그들은 동만지역 당조직에서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만주지방에 조선인당원들이 많은것은 간도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들의 대다수가 조선사람들이였기때문이다.

내가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것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 후부터였다.

화성의숙에서 《ㅌ. ㄷ》를 조직할 때나 길림과 오가자 등지에서 활동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중국공산당과의 련계가 없었다.

원래 혁명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의 신념과 목적에 따라 자주적으로 진행하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혁명의 지도사상을 마련하는 사업도 제 힘으로 하였고 우리 당의 시원인 《ㅌ. ㄷ》도 독자적으로 조직하게 되였다.

일제가 9. 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강점함으로써 조성된 새로운 정세, 일제가 조중인민의 공동의 적으로 된 새로운 환경은 우리와 중국공산당과의 련계문제를 성숙된 요구로 내세웠다.

1931년 겨울명월구회의를 전후한 시기에 나는 조아범의 집에 가있으면서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조직과 련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조아범은 길림에서 공부할 때 나와 함께 공청사업을 하였으며 그후에는 화룡지방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중국공산당조직에 관계하고있었다. 그후 유격대를 조직하고 왕청 등지에서 활동할 때에는 녕안현당의 책임적지위에 있으면서 동만지구까지 맡아보던 왕윤성이와 련계를 가졌으며 동장영이 대련에 있다가 동만특위에 파견되여왔을 때는 그와 깊은 련계를 맺었다. 나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이렇게 맺어졌으며 이 과정에 나는 중국당조직의 간부로도 활동하게 되였다. 동장영이 희생된 다음에는 위증민과 련계를 가지였다. 그밖에 나는 국제당 순시원이였던 반동무와도 련계를 맺고 사업하였다.

중국공산당과의 이러한 관계는 항일무장투쟁의 전기간 유지되였으며 그것은 일제를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확대하고 공동투쟁을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우리가 중국공산당과의 깊은 련계밑에 공동투쟁을 발전시켜나간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혁명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당시의 복잡다단한 정세와 1국1당제에 관한 국제당로선의 요구에 부합되는 주동적이면서도 신축성있는 조치이다. 우리는 중국공산당과의 이러한 공동투쟁을 적극 발전시키면서 시종일관 조국해방의 기치, 조선혁명의 주체로선을 견지하였으며 그것을 빛나게 관철하였다. 우리의 이러한 원칙적인 립장과 성실한 노력에 대하여 중국의 전우들은 혁명의 민족적의무와 국제적의무를 옳게 결합한 뚜렷한 모범으로 된다고 진심으로 찬양하였다.

수천수만을 헤아리는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간고하고 시련에 찬 항일의 대장정에 참가하였다.

1963년에 최용건동무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주은래총리는 심양에서 그의 생일을 축하하여 연회를 마련해주고 인상깊은 축하연설을 하였다. 그때 그는 축하연설에서 동북혁명을 개척하는데서 조선사람들이 주도적역할을 했다, 그래서 중조친선은 끊을래야 끊을수 없고 영원한것이다, 항일련군은 중조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의 련합된 혁명무력이였다라고 하였다.

동북혁명을 개척하는데서 조선사람들의 공로가 많다는데 대해서는 양정우, 주보중, 위증민동무들도 자주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중국혁명을 위해 사심없는 방조를 해주었기때문에 중국사람들도 우리의 일이라면 생사를 가리지 않고 성심성의로 도와주군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 후 우리는 유격대안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내왔다. 그것은 카륜에서 조직된 첫 당조직의 확대발전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였다. 우리의 자주적인 당조직은 그후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농조, 로조들에도 뿌리를 뻗치였다.

우리가 조국에 개선한 후 한달도 못되는 사이에 당창건의 위업을 수행할수 있었던것은 항일혁명의 장구한 나날 당건설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이 있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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