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궁에 만덕이라는 한 악공이 있었다.

그에게는 시집갈 나이에 이른 딸이 있었는데 마음씨는 물론 인물 또한 절색이였다.

어느날 그는 자기의 스승인 우륵(6세기 초중엽에 활동한 음악가)으로부터 자기 딸을 며느리로 삼겠다는 청혼을 받았다.

얼마전에 자기 집에 우연히 들렸다가 숙성한 딸을 보고 인물맵시와 례절에 탄복한 우륵이 만덕에게 사돈을 맺자고 했던것이다.

우륵의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인물도 잘난데다 총명하여 궁궐의 관리들이 은근히 마음에 두고있는 신랑감이였다.

만덕은 집에 들어서자바람으로 딸을 불러 우륵의 집에서 청혼해온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딸 필란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아버님은 늘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도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오늘 어찌 도리를 어기시고 저를 다른데로 시집보내려 하시나이까?》

만덕은 자기와 동갑친구인 법지의 아들 법랑에 대해 생각하였다. 법지는 만덕과 함께 우륵이 가야국에서 온 후 그의 제자로 뽑히웠다. 그들은 음악을 배우는 기간에 장가도 같이 들고 집도 나란히 지어 살아온데다 자식도 같은 날에 보게 되였다. 그들은 애들이 자랄 때 만덕의 딸은 법지의 며느리라, 법지의 아들은 만덕의 사위라 부르면서 지내왔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법지의 내외가 병을 앓아 세상을 떠났고 걸음마를 겨우 떼던 아들은 이웃마을에 혼자 사는 녀인이 데려다 키우게 되였다. 그런데 법지의 아들은 여러문살 났을 때에 시름시름 앓다가 눈이 멀었고 뒤이어 말도 못하게 되였다.

십여년세월이 흘러 법지의 아들을 자기의 사위라고 부르던것이 만덕의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더구나 앞을 못 보는데다 말까지 못하는 소경에 벙어리를 자기 사위로 삼으려는 생각은 조금도 가져보지 못했던 만덕이였다. 그런것을 오늘 새삼스레 딸이 말하니 만덕으로서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필란은 《우륵의 아드님은 인물도 잘나고 재간도 많다 하였으니 그가 다른 처녀를 구할수 없겠나이까. 그러나 법랑은 앞 못 보고 말도 못하는 병신이오니 저는 그가 홀로 세상을 마치게 할수 없나이다.》라고 하였다.

만덕은 성이 났지만 딸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이것은 스승과 결말을 맺은 혼사이니 달리할수 없다. 래일 당장 선보이러 신랑을 데려오겠으니 옷손질을 하고 몸단장도 잘하여라.》

이튿날 아침 만덕은 궁궐에 나가기에 앞서 딸이 옷손질과 몸치장을 어떻게 하고있는가를 보려고 그의 방문을 열었다.

순간 만덕은 놀랐다.

필란이가 간밤에 머리를 깎고 얼굴을 바늘로 찔러 먹물을 먹였던것이다.

하지만 그는 태연한 기색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님은 스승이 정한 혼사라 물리기 어려워하셨는데 인젠 우리가 거절치 않아도 저의 이 모양을 보면 그들이 저절로 물러날것이 아니오이까?》

이런 일을 당하고 대궐에 나간 만덕의 얼굴은 병든것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만덕에게서 딸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우륵은 심중한 어조로 말하였다.

《우리가 친우의 도리를 저버릴번 한것도 큰일이였지만 음악가로서 가야금을 더 훌륭하게 탈수도 없게 될번 하였댔구려. 친구의 도리를 어긴 우리들이 노래를 지은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수 있으며 남의 행복을 앗고서 가야금을 탄들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낼수 있었겠소?》

우륵은 옛 제자인 법지의 아들과 만덕의 딸의 혼례를 곧 치르어주자고 하였다.

이리하여 필란은 만사람의 축복속에 법지의 아들과 혼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