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민대중과 운명개척
사람은 사회적존재이며 사회적존재인 사람의 생존방식은 단결과 협력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운명을 성과적으로 개척하기 위하여서는 인민대중의 한 성원으로 되여야 한다.
인민대중은 력사의 주체로서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사회적운동으로 사회적진보를 추동하며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인민대중이 력사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당과 수령의 령도를 받아야 한다.
인민대중은 오직 당과 수령의 령도를 받을 때에만 력사의 자주적인 주체가 되여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갈수 있다.
이것은 운명개척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의 귀중한 진리이다.
1) 력사가 내세운 운명개척의 담당자
《전지전능한 존재》
사람들은 오래동안 자신들의 운명을 신에 의탁하여 풀어보려고 하였다. 하여 세상에는 《하느님》과 또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요, 《알라》요, 《부처》요 하는 각양각색의 신적존재들이 등장하였다. 사람들이 이러한 신적존재들을 우상화한것은 신이 바로 천지만물과 함께 사람도 만들어내고 또 온갖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하는 절대적인 힘과 무한한 자비심을 가졌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다. 신은 모든 운명개척의 열쇠를 가지고있고 신이 존재하고 그에 의탁하기만 하면 만사가 다 풀릴수 있다는 생각은 오래동안 사람들의 머리속을 지배하여왔다. 그러나 신에 대한 기대는 허물어졌다. 그것은 신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때문이였다. 그것을 증명한것은 과학이였다. 과학이 증명한데 의하면 신은 하늘에도 없고 지상의 세계에도 없으며 또 어제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것이라는것이다.
하다면 왜 우리는 《전지전능한 존재》에 대하여 말하게 되는가.
그것은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어디엔가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이 세상에 있고 또 그에 의하여 인간의 모든 운명이 좌우되기때문이다.
그러면 《전지전능한 존재》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이 사람들자신, 인민대중이 그러한 전지전능한 존재라는것을 발견하기까지에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에 대한 대답을 인간의 운명개척에서 자못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산활동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물론 생산활동이 인간의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이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자면 생산활동뿐아니라 정치활동, 사상문화적활동을 하여야 한다. 이 활동들은 인간의 운명개척에서 필수불가결한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가 다 쉽게 리해할수 있는것이 생산활동이기때문에 여기서는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이야기하자는것이다.
력사적으로 계승되면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간의 생산활동은 다른 모든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운명개척에서 참으로 커다란 역할을 논다고 말할수 있다.
자동차나 비행기를 비롯한 운수수단들, 사람들이 매일, 매 시각 소비하는 갖가지 식료품과 옷의 생산은 인간생활에서 한시도 멈추어서는 안될 필수불가결의것이다. 만약 이러한 생산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될것인가.
언젠가 어느한 사람은 세계적규모에서 생산이라는것이 단 몇분만 중단된다면 삽시에 예측할수 없는 대혼란이 일어나고 전 인류의 생존이 위협당할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물질적재부를 생산하는 활동이 인간의 생존과 발전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인류는 지구상에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 때부터 생산 그 자체를 필수적인 생업으로 여기고 생산활동을 끊임없이 진행하여왔으며 하여 오늘과 같은 거대한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였다.
그러면 인간의 생존과 발전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적재부생산의 직접적담당자는 누구인가. 과연 누가 생존할수 있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기본열쇠를 쥐고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자본을 그러쥔 자본가들이라고 한다. 그래도 생산을 하자면 그에 필요한 원료와 기계들과 로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것을 끌어당길수 있는 힘, 즉 자본이 필요하다, 자본은 힘이고 만능이다, 만능으로서의 자본은 바로 자본가들에게 있다, 그러니 자본가가 생산에서 결정적역할을 할수밖에 없다는것이다. 착취계급과 그 대변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있다. 이것은 천만부당한 주장이다.
만약 그들의 소유물인 자본이 그들에게 어떻게 집중되게 되였으며 또 그것자체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고 묻는다면 대답할 여지가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을것이고 또 착취하면서 살아가는것을 본성으로 하고있는 그들이 만들어내지도 않았기때문이다. 자본은 자본가가 로동하는 사람, 생산자에게서 빼앗아낸것이다. 그러니 자본가가 결정적역할을 한다는것은 거꾸로 된 론거이다.
생산의 모든 과정을 직접 맡아수행해나가는 담당자, 그것은 누구나가 다 쉽게 찾아낼수 있고 또 그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는 집단, 오늘에 이르는 기나긴 력사과정속에서도 한 모습, 한 본새대로 근면한 로동활동을 하는 집단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이 세상에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인민대중이다. 인민대중의 무궁무진한 힘과 지혜에 의하여 사회의 모든것이 창조되며 력사가 전진하고 혁명이 추동된다.》
이 세상에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민대중이다. 지난날 반동적인 착취계급에 의하여 지지리도 천대받고 멸시받으며 쫓기우고 몰리우던 절대다수의 수난자들이 바로 인민대중이였다. 인민이라는 말이 언제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 모든것을 창조하고 좌우지한다고 하던 창조자로서의 《신》에 비할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의 지위에까지 올라설줄이야 그 누구인들 가늠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 누구에 의한 상상물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그대로이다. 그것은 인민대중이 생산을 비롯하여 운명개척을 위한 활동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주동적으로 제기하고 해결할수 있는 직접적담당자이기때문이다.
인민대중은 운명개척의 참다운 주체이다. 인민대중을 떠나서는 인간의 운명개척에 대해서 론의조차 할수 없으며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 그 자체가 있을수 없다.
인류사에 이룩된 모든 사회적변혁들과 물질경제적 및 사상문화적재부의 창조에는 그 무엇이나 할것없이 인민대중의 고귀한 창조적지혜와 재능, 피와 땀이 깃들어있다.
인간을 《말하는 도구》, 《길들이는 짐승》으로 다루던 노예사회, 또 《신분》에 예속된 존재로, 《신》의 노복으로 여기던 봉건사회가 어떻게 력사무대에서 사라졌는가. 그것은 바로 사회적예속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사회와 력사발전을 떠밀고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줄기찬 투쟁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천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변색을 모르는 조선의 고구려무덤벽화라든가, 고대에짚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훌륭하고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누구에 의해 창조되였는가.
그것도 다름아닌 인민대중의 창조적활동에 의해서였다.
그러면 인민대중은 어떻게 되여 운명개척의 위력한 주체로 될수 있는가.
그것은 인민대중이 무궁무진한 창조적지혜와 힘을 가진 위력한 집단이며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을 주동적으로 일으키고 떠밀고나가는 결정적력량이기때문이다.
인민대중이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을 주동적으로 일으키고 떠밀어나가는 무궁무진한 창조적지혜와 힘을 가진 집단, 《전지전능한 존재》이라는것은 력사에 의하여 확증된 변함없는 진리이다.
그러면 인민이란 어떤 집단인가.
여기에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조선인민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기반에서 벗어난 해방직후에 있은 일이다. 그때 해방된 조선에 어떤 사회를 세우면 좋겠는가 하는 문제를 공동으로 협의한다는 명목으로 이전 쏘련과 미국이 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영한적이 있었다.
그때 평양에 온 공동위원회의 미국대표들과 조선사람들사이에 담화가 있었다. 조선측에서는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이 담화에서 미국대표는 새 조선건설과 관련된 조선인민의 의사에 대해 물은것이 아니라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하여 떠들면서 선전하려고 하였다. 그 주장이란 미국사회가 인민들에게 《자유》를 준다느니, 또 그들에게 《풍부한 물질생활》을 보장한다느니, 인민이 잘 사는 《우월한 사회》라느니 뭐니 하는것이였다. 쥐여짜보면 미국사회가 《인민의 사회》라는것이다. 그러다가 방 한구석에 수수한 조선옷차림으로 앉아있는 농민대표가 제일 《어리숙》해보였던지 그에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농민대표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당신들이 미국사회가 좋다고 하는데 그러면 당신들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었소?》
미국대표는 어안이 벙벙하여 대답하지 못하였다.
원래 미국자체가 인디안의 땅을 강탈하여 생겨난 략탈국가인데다가 오늘도 대토지소유자들만이 토지를 독차지하고있는 형편이니 그에 대해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농민대표는 다시 물었다. 《당신들의 법에 녀성들에게 남자들과 꼭같은 권리를 준다는 조항은 있소?》 미독점재벌들을 위한 법이니 그러한 조항이 있을리 만무하였다. 역시 이에 대해서도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당신들이 미국사회가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로동자, 농민, 녀성들을 내놓고 도대체 인민이란 어떤 사람들이요?》 이 마지막물음에 미국대표는 아예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이 농민대표가 말한바와 같이 로동자, 농민, 지식인, 녀성들을 내놓고 누가 인민이겠는가. 인민이란 결코 착취사회에서 권세를 부리는 착취계급이나 또 특출한 재능을 가진 몇몇의 집합체가 아니다.
다시말하여 인민이란 근로하는 사람들을 기본으로 하여 자주적요구와 창조적활동의 공통성에 의하여 결합된 사람들의 집단이다.
이러한 인민대중이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를 변혁하며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창조하는것이며 인간의 운명개척에서 결정적역할을 하는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사람이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인민대중에게 의거하여야 한다.
최대의 행운, 최대의 불행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을 때를 제일 행복한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부모가 배고파할세라 먹을것을 주고 추워할세라 따뜻한 옷을 마련해주며 어떤 소망이라도 다 해결해주기때문이다. 지어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하기에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을 때를 제일 행복한것으로 여기며 부모를 잃었을 때 제일 슬퍼하는것이다.
이로부터 아이들에게 최대의 불행, 최대의 행운이 다름아닌 부모에 있다고 말할수 있다.
인민대중에게 있어서 최대의 불행과 행운도 이와 조금도 다를바 없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탁월한 수령을 모시지 못한 인민은 부모잃은 고아의 처지와 다름이 없다.》
인민은 자기를 키워주고 이끌어주는 령도자가 있어야 최대로 행복하며 령도자가 없으면 최대로 불행하게 된다.
그것은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에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과 관련된다.
운명개척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에서 그 성패는 인민대중이 탁월한 수령의 지도를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 하는데 달려있다.
인민대중이 력사와 자기 운명을 자신이 틀어쥐고 자주성을 위한 혁명운동을 승리적으로 전진시키며 사회발전의 힘있는 추동력으로 되자면 혁명의 자주적인 주체로 되여야 한다. 혁명의 자주적인 주체로 된다는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인민대중이 수령의 혁명사상에 의하여 의식화되고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사상적으로, 도덕의리적으로 결합된 사회정치적집단으로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이런데로부터 수령의 령도를 떠나 자주적주체로서의 인민대중의 운명전환에 대해 생각할수 없다. 아이들이 아무리 뛰여난 소질이 있고 지향이 있다하더라도 부모가 그것을 키워주고 도와주고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피여나지 못하고 시드는것처럼 아무리 력사가 오래고 찬란한 문화전통을 가진 인민이라도 수령, 령도자가 없으면 무궁무진한 지혜와 힘을 발휘할수 없고 운명의 주인으로 될수 없다. 그러나 탁월한 수령을 모시면 아무리 령토가 작고 인구수가 많지 않은 나라의 인민이라도 의식화, 조직화된 강위력한 력사의 주체로, 그 어떤 조건에서도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는 강대한 인민으로 될수 있다.
돌이켜보면 조선인민은 5천년민족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동지를 위대한 수령으로 높이 모신 그때부터 비로소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하는 존엄있고 긍지높은 인민으로 될수 있었다.
조선민족은 반만년력사를 이어오면서 대대로 한강토에서 찬란한 력사와 문화를 창조하고 꽃피워온 지혜롭고 문명하며 강의한 민족으로 세상에 그 이름 떨쳐왔다.
그러나 조선인민은 기나긴 세월 언제한번 자기 운명의 참다운 주인, 국가정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되지 못하였고 오랜 세월 봉건전제제도를 비롯한 가혹하고 야만적인 착취와 억압밑에서 신음하여왔다. 물론 조선인민은 착취와 억압을 고스란히 감수한것은 아니였으며 그것을 반대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려왔다. 림꺽정농민폭동이나 갑오농민전쟁이 그 대표적실례라고 말할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실패를 면치 못하였다.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그들이 착취제도와 착취계급의 반동적본질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또 반봉건투쟁을 목적의식적이고 조직적인것으로 벌려나가지 못한데 있다.
인민대중이 자주적인 주체로 되는것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되기 위한 결정적고리이며 그러자면 옳바른 지도를 받아야 한다. 옳바른 지도가 있어야 인민대중이 운명개척투쟁을 목적지향성있게 벌릴수 있는 사상을 가질수 있고 또 위력한 힘을 가진 조직으로 뭉칠수 있다. 즉 의식화, 조직화될수 있다. 인민대중에 대한 옳바른 지도는 탁월한 수령에 의하여서만 빛나게 실현된다.
수령을 모시고 그의 령도를 받아야 갈길 몰라 헤매이던 인민대중의 심장속에 자주의 넋이 심어지고 뿔뿔이 흩어져있던 그들이 하나로 뭉쳐 위력한 힘을 발휘하는 주체로 될수 있다.
불행과 곡절, 쓰디쓴 실패만을 겪던 조선인민의 운명개척투쟁에서 새로운 시원이 열리기 시작한것은 바로 김일성동지를 모신 때부터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세기를 두고 중세기적인 봉건적착취와 압박에 시달려왔으며 근대이후에는 일제의 식민지적억압과 략탈까지 겹쳐들어 전대미문의 고통과 불행을 당하여온 조선인민의 운명사에 근본적인 전환의 새 력사를 펼쳐주시였다.
일찍부터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서 신음하는 조선인민의 운명을 구원하실 큰 뜻을 품으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새로운 혁명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그것을 조선인민에게 심어주시여 기나긴 세월 사람들의 사상정신을 좀먹던 사대와 교조를 영영 불사르고 자주성이 강한 인민, 불패의 위력을 지닌 인민으로 키우시였다.
주체사상으로 무장함으로써 조선인민은 자기 수령, 자기 당을 믿고 당과 수령에게 자기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며 당과 수령의 두리에 일심단결하여 당을 따라 수령과 생사운명을 같이해나가는 사상정신적풍모를 지니게 되였다.
조선인민은 주체사상에 의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주견과 판단에 따라 자기가 선택한 길로, 자기 식으로 혁명을 해나가는 자주적인 인민,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생명으로 여기며 그것을 고수하기 위하여 견결히 싸워나가는 혁명적인민으로 되였다.
인민대중이 자기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하는데서 의식화에 못지 않게 중요한것은 그의 조직화이다. 조직적으로 단결하는것은 인민대중이 운명개척의 위력한 주체로 되기 위한 기본요인이며 또 그것은 인민대중이 바라는것이다. 그런데 인민대중의 조직화는 그들이 바란다고 하여 저절로 되는것이 아니다.
인민대중이 조직화되자면 그들의 자주적요구와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고 실현하며 그것을 능숙하게 조직동원할수 있는 비범한 능력과 령도예술을 지닌 탁월한 수령이 있어야 한다.
수령은 인민의 리익을 옹호실현할수 있는 사상을 내놓는 한편 비상한 조직력으로 당을 창건하고 그 두리에 광범한 대중을 묶어세움으로써 인민대중의 조직적단합의 중심으로 된다. 수령을 떠난 인민대중의 조직화란 생각할수 없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 시기부터 혁명과 건설에서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근본방도를 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이는데서 찾으시고 혁명과 건설의 매 단계마다 당을 강화하고 령도적역할을 높이며 그 두리에 광범한 인민대중을 묶어세우심으로써 제기되는 모든 과업들을 성과적으로 풀어나가도록 하시였다.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마침내 우리 조국땅우에 인민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고 모든것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제도, 조선인민의 행복의 보금자리가 마련되였다.
오늘 조선인민은 김일성동지 그대로이신 김정일동지의 선군령도따라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의 령마루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나가고있다.
인민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행운이 지도자를 잘 만나는것이라면 반대로 최대의 불행은 지도자를 잘못 만나는것이다. 인민을 등진자들, 수정주의자들, 기회주의자들이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 인민이 당하는 고통과 불행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크다.
바로 레닌의 령도밑에 지구상에 첫 사회주의국가를 일떠세웠던 이전 쏘련인민의 비극적운명이 정권의 자리에 흐루쇼브와 고르바쵸브와 같은 수정주의자들, 사회주의배신자들이 올라앉았을 때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운명개척투쟁무대에 수정주의자들이 나타나면 인민대중의 운명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수정주의자들은 인민의 운명같은것은 안중에 없이 오직 저들의 일신의 안일과 정권욕만을 추구하는 야심가들이며 제국주의자들앞에 투항하여 인민과 혁명의 운명을 제국주의자들에게 서슴없이 팔아먹는 배신자들, 변절자들이다.
일찌기 기회주의의 원시조인 프루동, 수정주의의 시조인 베른슈타인, 《정통맑스주의자》로 자처하던 카우쯔끼들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뒤집어엎고 사회주의혁명을 실현하기 위한 로동계급과 인민대중의 혁명투쟁은 커다란 사상적혼란과 좌절의 쓴맛을 체험하였다. 이전 쏘련에서도 뜨로쯔끼와 부하린에 의하여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은 적지 않은 난관과 시련을 겪었다. 이자들은 레닌이 이룩한 사회주의혁명업적과 레닌이 내놓은 전략전술들을 외곡변질시키기 위하여 온갖 비렬한 음모책동을 다하였다. 그러나 레닌의 위업에 충실하였던 쓰딸린에 의하여 그자들의 책동은 여지없이 분쇄되였다.
그러나 쓰딸린이 서거한후 또다시 수정주의자들, 배신자들, 음모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흐루쇼브였다.
이자는 정권의 자리에 올라앉은 다음부터 이른바 《개인미신》을 반대한다는 구실밑에 쓰딸린이 이룩한 사상과 업적들을 말살하는데 첫째가는 공격의 화살을 집중하였다.
수령에 대한 부정은 곧 수령에 의하여 이룩된 모든것을 부정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즉 사회주의혁명의 승리와 사회주의공업화,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승리와 업적을 모조리 말살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쏘련인민대중의 운명개척에서 일어난 위대한 세기적변혁자체를 부정한다는것과 직결되였다. 묻건대 이것은 쏘련인민을 위대한 사회주의혁명이전의 비참한 운명의 시기, 착취와 억압, 예속의 구렁텅이에로 몰아가는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여 이전 쏘련인민은 벌써 초벌죽음을 당하였고 운명의 한발을 이미 비극의 대문안에 들여놓았다고 말할수 있었다.
그러나 더 비참한 죽음은 1990년대초 현대수정주의의 가장 큰 변종인 현대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졌다.
그 대표자는 세상이 다 아는 고르바쵸브였다. 고르바쵸브를 비롯한 현대수정주의자들은 《새로운 사고방식》이요 뭐요 하면서 지난 70년동안 이룩된 모든것을 부정말살하였다. 수령도 부정하고 당도, 사회주의도 인민도 헌신짝처럼 줴버렸다. 1990년 3월 쏘련공산당이 쏘련 《사회의 지도적 및 향도적력량》이라고 규정한 쏘련헌법 제6조를 페기하고 12월 25일 피압박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해 생명을 서슴없이 바친 수많은 선렬들의 피가 스며있는 혁명의 붉은기를 내리우게 한것, 1991년 12월 8일 독립국가협동체창설에 관한 협정을 조인하고 쏘련존재의 종식을 선포한것 등이 그것을 말해주고있다. 이로 하여 이전 쏘련인민은 자기들의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줄 령도자도, 당도, 국가도 없는 불행하고 가련한 《고아》의 신세로 굴러떨어졌다. 그후의 인민의 운명에 덮쳐든 파국적후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것이다.
자연재해도, 정복전쟁의 후과도 아닌 배신자들, 수정주의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후과는 아직 력사가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을만큼 참으로 비참한것이였다. 흔히 사람들은 20세기 참극이라면 두차례의 세계대전이나 미제에 의한 원자탄피해를 든다. 그러나 이전 쏘련인민에게 들씌워진 참극은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운명개척의 모든 령역에서 빚어진것으로 하여 그 이전 참극을 릉가하는 20세기 최대참극으로 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참극을 두고 가슴을 치며 통탄해하면서 이렇게 웨치고있다. 자기들의 운명을 진정으로 돌봐주고 보살펴줄 지도자가 없으니 비극이 초래되였다고.
그러면 수난과 곡절도 있었고 행운도 있었던 이전 쏘련인민의 기나긴 운명사를 통하여 찾게 되는 운명개척의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인민에게 있어서 최대의 행운은 위대한 수령을 모시는데 있고 인민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위대한 수령, 인민의 진정한 지도자를 모시지 못한데 있다는것이다.
자기를 알아야 강자가 된다
세상사람들의 찬탄과 커다란 환희를 불러일으켰던 주체조선의 걸작들인 5대혁명가극들이 탄생한 때로부터 어언 30여년 세월이 흘렀다. 5대혁명가극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혁명가극 《피바다》, 《꽃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이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격동적인 사변을 안아온 5대가극명작들을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다른 혁명가극들도 그러하지만 처음으로 창조된 혁명가극 《피바다》에 대한 감회는 더욱 크다고 말할수 있다.
일명 《혈해》라고 하는 이 작품은 1936년 항일무장투쟁시기에 김일성동지께서 몸소 창작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이다. 작품은 일제의 조선강점시기 어느 한 마을의 남편과 두 아들, 딸이 있는 소박한 녀성을 주인공으로 하고있다. 보기에는 평범하고 흔한 줄거리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이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킨것은 무엇때문일가. 오래동안 지배되여온 《아리아》나 《대화창》을 기본으로 하는 유럽의 고전적인 《오페라》식의 낡은 가극들을 밀어제끼고 새 시대의 혁명가극의 전형이 처음으로 창조되였기때문일가.
당시 세계가극계에는 유럽의 전통적인 가극들인 《동백꽃아가씨》, 《카르맨》 등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낡은 가극형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하여 가극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잃고 서서히 조락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혁명의 폭풍마냥 새 가극의 열풍을 몰아온것이 바로 혁명가극 《피바다》의 창조였다. 혁명가극 《피바다》의 창조는 노래가 절가화되여 인민들이 알기 쉽게 된것을 비롯하여 내용과 형식에서 완전히 새로운것으로서 그것은 세계가극분야에서 일대 혁명이였다.
허나 《피바다》혁명가극이 그토록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것은 비단 그 예술형식에서의 혁명에만 있지 않았다. 그것은 혁명이란 아무것도 모르던 소박한 농촌녀성이 혁명적으로 각성되여 거세찬 혁명의 불길속에 뛰여드는 혁명가로 자라나는 성장과정을 보여준데 있는것이다. 다시말하여 혁명적으로 각성되고 투쟁속에서 단련될 때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참된 인간으로 자라날수 있다는 운명개척의 진리를 보여준 바로 여기에 커다란 감화력을 불러일으킨 기본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혁명적각성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의 성장발전을 근본적으로 담보한다. 혁명적으로 각성되는가 각성되지 못하는가 하는데 따라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될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못할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투쟁도 할수 없으며 따라서 그 어떤 발전도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착취계급사회에서 혁명적으로 각성되지 못한 인간이 살수 있는 길이란 오직 하나 이 사회가 좋은지 나쁜지, 얼마나 자신을 죽이는것인지도 모르고 착취와 억압을 그대로 감수하면서 순종하여 살아가는 노예적인 숙명의 길뿐이다. 반대로 혁명적으로 각성되기만 하면 무엇때문에 자신이 노예적처지에 처하였고 노예적처지를 깨뜨리고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알수 있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투쟁에 떨쳐나설수 있다. 즉 혁명가로 될수 있다. 의식화, 각성은 곧 삶이며 운명개척의 열쇠이라고 할수 있다.
바로 이런 사상이 《피바다》의 주인공어머니의 성장속에 생동하게 구현되였으며 그것이 사람들을 경탄의 세계에로 이끌어갔던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의식화될 때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하는 참다운 인간으로 될수 있는가. 이것을 《피바다》의 주인공어머니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보기로 하자.
주인공인 순녀는 처음에는 혁명은 고사하고 자기가 살고있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던 어리무던한 촌아낙네였다. 자기가 정든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고생스럽게 살고있는것이 왜놈들이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하기때문이라는데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였다.
살아갈 길이 막막하여 고통과 불행속에 허덕이는 마을사람들의 비참한 실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남편에게 이렇게 묻는다.
《정말 세상은 왜 자꾸 이 모양이 되갈가요? 모두 살기 힘들어해요.》
그러자 남편은 《나라를 빼앗기고 이렇게 쫓겨와사는 신센데 어떻게 편안할수가 있겠소.》
《저 왜놈들이 왜 조선에 왔나요?》
《왜놈들이 왜 조선에 오다니.》 남편은 안해의 어린애같은 물음에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우리 나라를 먹으려고 쳐들어왔지 왜 왔겠소.》
《제 나라도 있는데 왜 남의 나라를 먹어요?》
여기에서 보다싶이 그는 이렇게 세상물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녀성이였다.
그리고 하늘같이 믿고있는 남편이 없으면 비참한 세상을 한시도 살아갈수 없다고 여기는 녀성이였고 두 아들과 딸을 배불리 먹여볼 한가지 생각만을 품고 사는 순박한 어머니였다. 그러기에 그는 왜놈에게 짓밟히고 빼앗기면서도 눈물밖에 지을줄 몰랐고 왜놈의 《토벌》로 남편을 무참히 잃고서도 통곡밖에 하지 못하였으며 혁명의 길에 나서는 자식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가봐 바람소리에조차 소스라쳐 놀라군하는것이다. 이때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세상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것을 운명으로, 숙명으로 여기였던 불행한 인간이였다.
바로 이렇듯 어리무던하던 그가 남편과 자식들의 뒤를 이어 왜놈들을 반대하는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그의 의식속에 왜놈들에 대한 증오심이 싹트기 시작하였을 때부터였다. 사람이 혁명에 나서게 되는것은 우선 그의 의식에서의 변혁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식에서의 변혁, 자주적인 사상의 체득, 그것은 운명개척의 첫 걸음이다. 그래서 혁명운동, 운명개척투쟁은 사람들을 의식화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의식화된 사람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의식적인 운동이라고 하는것이다.
어머니는 처음에 마을을 불태우고 남편을 학살하는 왜놈들의 만행을 목격하는 과정에 그놈들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하였다. 그러나 그 증오심은 반항심으로 승화되지 못하였다. 왜놈이란 미운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피해야 할 무서운 존재로만 여겼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하여 왜놈에게 짓밟히고 빼앗기고 쫓기운것이 분하고 원통하고 이가 갈렸지만 어머니는 항변한마디 하지 못하였다. 《옛날부터 악한 놈은 망한다고 하더라》라는 한심한 소리만을 념불처럼 외우는것이 고작이였다.
그러던 그가 피맺힌 원한을 풀려면 왜놈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것을 깨달은것은 바로 아들 원남이와 지하공작원으로부터 사상적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 과정에 자기의 처지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해야 하며 왜놈들을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는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후 조직이 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또 왜놈들에게 체포되여 고문을 당하는속에서 그의 혁명적각성은 더욱 승화되였다. 지하공작원과 사랑하는 아들 을남이가 일제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온 마을이 일제의 《토벌》로 불바다, 피바다가 되는것을 목격하면서 드디여 어머니의 쌓이고 쌓인 분노는 폭발하였다. 이때 그의 분노와 반항은 단순한 무의식적인 몸부림이 아니였다. 그것은 각성되고 의식화되여 왜놈들과 맞서 싸우는 견결한 혁명정신이였다. 그는 이미 자식이나 남편만을 걱정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혁명가였다. 성시로 공격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성과적전진을 보장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성문을 열어제끼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전에는 찾아볼수 없었던 전혀 다른 모습이였다.
혁명가로서의 그의 참모습은 마을이 해방된후 그가 마을사람들앞에서 한 연설에서 강렬하게 비쳐졌다. 《이제는 슬픔속에 울고만 있지 않을것입니다. 눈물과 한탄으로써는 원쑤를 갚을수 없습니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우리들이 살길은 혁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혁명을 합시다. 혁명만이 살길입니다.》
여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어제날에는 피바다의 수난자였지만 오늘은 피바다를 헤쳐나가는 불굴의 투사, 혁명가로 된 주인공어머니의 형상을 통하여 무엇을 알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을 혁명사상으로 의식화하는 여기에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참다운 길이 있다는것, 천대받고 압박받는 인민이 각성되기만 하면 운명을 자기의 힘으로 개척하는 운명의 개척자, 주인으로 될수 있고 자기의 처지와 사회를 변혁하는 투쟁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할수 있다는것을 알수 있는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화는 운명개척의 첫 걸음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의식화하는 사업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각성시키는 일이 물건을 생산하듯 눈에 나타나지도 않고 또 옷을 갈아입듯이 사람의 사상을 요구하는대로 인차 바꿀수도 없으며 한두번의 노력으로 끝나지 않는 장기적인 사업이기때문이다. 더구나 처지도 다르고 생활조건과 환경, 의식수준이 천태만상인 수백수천만 인민대중을 다같이 선진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사업이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그만두겠는가. 그럴수 없다. 낡은 사상에 물젖어있으면 언제가도 노예적운명에서 벗어날수 없기때문이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상적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자기의 운명을 개척할수 없다. 지난날 인민대중은 고귀한 모든것을 창조하여왔다. 그러나 창조의 주인으로 되지 못하고 노예로, 농노로, 임금로동자로 되여 착취와 압박을 받으며 살아온것은 그들을 무지하고 몽매하게 만들기 위한 반동적착취계급들의 악랄한 사상적몽매화책동과 탄압으로 하여 오래동안 반동적이고 그릇된 사상에 물젖어 있었기때문인것이다. 즉 사상적질곡이자 노예적운명이였다.
그러므로 인민을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만들자면 그들을 반드시 의식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선진사상으로 무장시켜야 한다.
인민대중을 의식화하는데서 기본은 그들을 수령의 사상으로 무장시키는것이다.
수령의 혁명사상에는 인민대중의 자주적지향과 요구가 집대성되여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도들이 뚜렷이 밝혀져있다.
수령의 혁명사상이야말로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된다.
그러므로 인민대중이 수령의 혁명사상으로 무장하여야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려는 자각과 그 실현방도를 체득할수 있으며 그 실현을 위한 투쟁에 과감히 일떠설수 있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친히 창작지도하신 연극 《피바다》가 만강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였을 때였다.
공연을 하는 그날, 무대우에 자기들이 겪어온 생활과 꼭같은 생활이 펼쳐지자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쥐고 연극의 세계에 끌려들어갔고 나중에는 갑순이와 함께 울고 어머니와 함께 부르짖었다. 한 로인은 지금 자기가 연극을 본다는것도 잊고 무대에 뛰여올라가 을남이를 쏘아죽인 일본군 《토벌대장》역을 맡은 대원의 이마를 장죽으로 후려치기까지 하였다.
참으로 대성공이였다. 《피바다》의 공연을 통하여 사람들은 혁명만이 살길이라는 심오한 진리를 체득하게 되였다. 만강에서의 연극공연은 두메산골 까막눈이던 젊은이들, 늙은이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여 항일혁명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로 개변시켰다. 이때를 회상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우리가 만일 여기서 공연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있을가. 허락여촌장이 말한것처럼 아마 초저녁부터 불을 끄고 어둠속에서 잠을 청하고있거나 꿈나라로 갔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각도 만강의 집들에서는 등잔불이 타오르고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마을에 등불을 가져다준 셈이 아닌가.》
오늘 혁명가극 《피바다》는 높은 사상예술성으로 하여 세상사람들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최고봉의 예술》,《최고의 대걸작》으로, 세상사람들의 혁명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종소리》로, 그들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로 격찬되고있다.
그러기에 가극을 본 한 외국인은 이렇게 토로하였다.
《혁명가극 는 진정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의 완전한 승리를 보여주는 불후의 걸작이다.
나는 이 가극을 보고 그이의 혁명사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유일한 홰불이라는것을 확언하였다.
이 가극은 세계인민들에게 커다란 혁명적영향을 줄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극은 응당 인민들을 각성시키고 지구상에서 착취와 압박, 천대와 멸시를 청산하며 세계인민들이 모두다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할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들이 세계곳곳에 다니면서 이 가극을 공연하여 아직 각성되지 못한 사람들의 눈을 틔워주었으면 좋겠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혁명가극 《피바다》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공연될 때 《피바다》의 어머니만 등불을 가지게 되는것이 아니라 이 가극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등불을 가지게 될것이다. 그만이 혁명가로 되는것이 아니라 이 가극을 본 모든 사람들이 투사로 자라날것이다. 그때는 압제의 어두운 세상은 영원히 물러가고 인민대중모두가 운명의 주인으로 되는 밝은 새 시대가 밝아올것이며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에서는 위대한 전환이 일어날것이다.
《특허무기》
랭전이 종식된 오늘 미국은 세계의 일원적지배를 추구하면서 어떻게 하나 사회주의의 보루인 조선민주주의의인민공화국을 압살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발악하고있다.
미군부의 《두뇌진》들이 최근에 또다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콤퓨터모의전쟁을 벌려놓은 사실도 그러한 책동중의 하나이다.
콤퓨터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미국의 전쟁사환군들은 군사분야에 콤퓨터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콤퓨터를 리용하여 전쟁을 앞두고 쌍방간의 무력과 잠재력을 기억시키고 비교하여 승부를 판단하는 콤퓨터모의전쟁을 빈번히 하고있다.
미국의 호전세력들은 이라크전쟁을 앞두고도 콤퓨터모의전쟁을 벌려놓고 저들이 《이긴다》는 답이 나오자 쾌재를 올리며 진짜 전쟁을 감행하였다고 한다. 지난 조선전쟁 때 다 이긴 전쟁이라고 호언장담하다가 패전하여 세계의 면전에서 망신과 수치만을 당한 미국은 콤퓨터모의전쟁을 통하여 조선전쟁을 감행하는 경우에 《승리》라는 답이 나오기만을 고대하고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전쟁열에 들뜬 미군부의 《두뇌진》들보다 더 정확한 콤퓨터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렇고 이번에도 저들이 《진다》는 답만이 나왔다. 그리하여 미국의 호전세력들은 커다란 불안에 사로잡혀 어쩔바를 모르고있다고 한다.
그러면 세계의 《유일초대국》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을 벌벌 떨게 하고 세계를 놀래우는 조선의 위력한 힘의 원천, 그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조선이 미국이나 세계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최신형특수무기라도 가지고 있단말인가.
《오늘 북조선에서는 남녀로소 모두가 김정일동지를 위해서라면 육탄이 될 각오가 되여있다. 미국은 이것때문에 북조선을 무서워하고있으며 핵무기를 가지고있으면서도 북조선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고있는것이다.》
《수령과 전사간의 혼연일체,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결사옹위정신으로 일관된 조선인민군의 백절불굴의 투지,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핵무기나 미싸일보다 더 위력한 조선의 특허무기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미국의 CNN TV방송과 탄자니아신문 《와투》가 전한 내용의 한 토막들이다.
세계가 한결같이 인정하고있는바와 같이 조선의 불패의 힘의 원천은 바로 수령, 당, 군대, 인민의 일심단결에 있다.
전체 인민이 령도자를 중심으로 사상의지적으로, 도덕의리적으로 굳게 뭉친 조선의 일심단결은 원자탄보다 더 위력한 무기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한 무기라고 하면 원자탄을 념두에 둔다.
20세기 40년대에 개발되여 시험과 실지 적용에서 그 폭발력과 파괴력을 과시한 원자탄은 그 어느 무기와도 대비할수 없는 《최우수급무기》로 공인되게 되였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이 세계에 원자탄의 물리적힘을 릉가하는 그보다 더 위력한 무기가 있다는데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있었다. 그것이 바로 인민대중의 일심단결이다.
원자탄의 위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일심단결의 위력에는 한계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일심단결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운명개척에서 그 무엇에도 비할수 없는 최상, 최대의 무기이며 《특허무기》라고 말할수 있다.
일심단결이 얼마나 위력한가.
1994년 조선인민이 하늘처럼 믿고따르던 김일성동지께서 서거하시여 대국상을 당한 조선인민앞에는 형언할수 없는 시련과 난관이 겹쳐들었다.
사회주의시장의 붕괴, 미국과 제국주의련합세력의 정치군사적압력과 끈질긴 경제적봉쇄, 년년이 겹쳐드는 자연재해로 하여 조선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식량사정하나만 놓고보아도 자연재해로 매해 수백만t의 알곡손실로 하여 심한 식량부족이 생기였다. 인민들은 항일전쟁사에 그처럼 어려웠던 처창즈근거지시기처럼 풀죽으로 끼니를 에웠다. 오죽하면 공화국의 창건이래 처음으로 《대용식품》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식량뿐아니라 전력, 생활필수품 등 모든것이 부족하였다.
이 시기 자연재해로 하여 식량난, 생활난을 겪고있던 나라는 세계적으로 한두나라가 아니였다. 아프리카땅에서는 수십만명의 피난민이 먹을것을 찾아 자기 고향, 자기 나라를 버리고 이웃나라로 떠나갔다.
세상사람들은 조선도 례외로 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조선이 어차피 붉은기를 내리우고 《개혁》, 《개방》에로 나가지 않으면 안될것이라고 하였고 서방은 사회주의조선이 제국주의의 검은 파도를 이겨내지 못할것이며 앞으로 세계에는 사회주의나라가 없을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은 배고프다고 하여 붉은기를 내리우지 않았으며 다른곳을 넘겨다보지 않았다. 살아도 죽어도 자기 수령과 생사운명을 같이할 철석의 신념을 안고 자기 수령이 마련해준 사회주의조국,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
《믿어주십시오. 장군님!
저희들은 굶어죽으면 죽었지 장군님을 간직한 이 심장은 절대로 팔지 않을것이며 얼어죽으면 죽었지 장군님품을 떠나 남의 집 지붕밑으로는 한발자국도 들어서지 않을것이며 단두대우에서 매맞아죽으면 죽었지 장군님노래를 순간도 멈추지 않을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한 시인부부가 김정일동지께 삼가 올린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것은 비단 한 시인부부의 신념과 의지만이 아니라 조선인민모두가 간직하고있는 절대불변의 신념이고 의지이다. 령도자는 인민을 굳게 믿고 끝없이 사랑하며 인민은 령도자를 절대적으로 흠모하고 따르는 이 일심단결이 있음으로 하여 조선인민은 미제와 반동들의 집요한 반사회주의고립압살책동속에서도 사회주의를 수호할수 있었으며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내고 자주적인민으로서의 존엄과 영예를 떨칠수 있었던것이다.
조선의 오늘의 현실은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을 참답게 개척해나가려면 반드시 단결하여야 한다는것을 웅변으로 보여주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단결된 인민대중만이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갈수 있습니다.》
인민대중이 선진사상으로 무장하였다고 하여 운명개척의 참다운 주체로 되는것은 아니다. 인민대중이 운명개척의 참다운 주체로 되자면 의식화되는것과 함께 반드시 조직화되여야 한다.
인민대중의 운명은 자연을 정복하고 낡은 사회제도를 변혁하는 투쟁을 통하여 개척되며 그 과정은 결국 자연과의 대결, 반동세력과의 대결이다. 따라서 이 대결에서 인민대중이 승리하려면 그럴만한 힘을 키우는것이 중요하다. 자연의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힘이 어떤가 하는것은 누구나 인차 표상이 갈것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 인류가 자연정복의 길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고있고 자연의 횡포앞에 속수무책인 가련한 존재가 아니지만 어쨌든 자연을 길들이고 리용하여 풍족한 물질생활을 누리려면 웬간한 힘으로서는 되지 않는것이 사실이다.
새 사회를 세우기 위한 투쟁은 더욱 그렇다. 력사에는 반동적지배계급이 스스로 인민대중에게 자리를 양보한적이 단 한번도 없다. 낡은 사회제도를 수호하려는 반동들의 폭력은 그 사회의 전체 물질적, 정신적폭력수단의 집합체이며 반동들의 반항은 필사적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피를 흘려야 하는 생사판가리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반동세력을 릉가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반혁명의 반항을 격파하는 힘은 바로 인민대중의 단결에 있다.
그러면 단결이 그렇듯 중요하고 인민대중이 단결하여야만 승리할수 있다면 어떻게 단결하여야 하는가. 사람들이 그저 한데 모였다고 하여 단결로 되며 또 승리가 저절로 이루어지는가.
단결이 진정으로 인민대중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투쟁에서 위력한 무기로 되자면 수령을 중심으로 일심단결 되여야 한다. 일심단결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운명개척의 가장 위력한 무기이며 천하지대본이라고 말할수 있다.
일심단결 그것은 하나의 사상과 마음, 하나의 의지로 굳게 뭉친다는것으로써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운명개척에서 나서는 그 어떤 문제도 자그마한 편향이나 우여곡절도 없이 성과적으로 해결해나갈수 있게 하는 만능의 보검이다.
이것은 여럿이 모여서 무거운 물체를 들 때 그것을 드는 사람들이 하나의 구령에 따라 하나의 마음으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방향으로 힘을 집중하여야 성공할수 있는것과 같은 리치라고 말할수 있다. 목적도 하나로 지향되고 힘도 하나로 합쳐져야만 운명을 개척할수 있는 법이다.
일심단결의 위력은 그뿐이 아니다. 일심단결은 인민대중이 자기의 창조적지혜와 힘을 발휘하게 하는 근본원천이다.
인민대중은 세상에서 가장 위력한 힘을 가지고있지만 그것은 저절로 발휘되지 않는다. 반드시 하나의 사상과 하나의 중심에 기초한 단결, 일심단결을 이룰 때에만 그 무궁무진한 힘을 발휘할수 있으며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갈수 있다.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나가려면 령도자를 중심으로 사상의지적으로, 도덕의리적으로 굳게 뭉쳐야 한다는것, 이것은 자주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사가 인류에게 남긴 운명적인 교훈이다.
2) 자주의 항로
자유의 기슭을 향해
1896년 12월 10일 이딸리아의 산제모의 미오니드에서 스웨리예발명가이며 니트로글리세린을 원료로 다이나마이트를 만드는 방법을 발명한것으로 하여 유명해졌고 유럽최대의 부자가 된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이 림종에 들어서고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마지막 생각을 더듬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지지 않을만큼 노력해왔다. 규조토를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다이나마이트라는 이름을 마치 내 아들의 이름을 짓듯이 성심껏 생각해냈었지. 그 다이나마이트는 턴넬공사를 할 때나 광산에서 얼마나 편리하게 쓰이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폭약을 연구한데는 잘못이 없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왜 그 폭약을 사람을 죽이는데 쓴단 말인가? 그렇다. 내가 죽으면 내가 남긴 돈을 기금삼아서 평화와 과학발전에 애쓴 사람들에게 상을 주게 하리라.》
노벨은 유언으로서 막대한 유산인 3 150만Kr (168만£)를 스웨리예과학학술원에 기부하였고 그 기금으로 인류의 최대행복에 이바지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도록 하는 《노벨상》제도가 제정되였다. 노벨상에는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의 6개 부문상이 있다. 해마다 그가 죽은 날인 12월 10일 스웨리예의 스톡홀롬에서 (평화상만은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과학발전과 평화에 특별한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이 상이 수여되고있다.
그러나 오늘 일부 노벨상은 슬프게도 과학의 발전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의 롱락물로 리용되고있다.
대표적인것이 비렬한 배신자이고 반사회주의자인 이전 쏘련대통령 고르바쵸브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된 사실이다. 고르바쵸브는 쏘련을 붕괴시키고 인민들의 운명에 커다란 재난과 민족분쟁의 류혈을 가져다준 극악한 범죄자이다.
제국주의자들은 70여년동안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들여 무진애를 쓰면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쏘련의 파괴를 순간에 이루어놓은 고르바쵸브를 찬양하기 위해 노벨평화상을 도용하였다. 아마 이 사실을 안다면 100여년전에 사망한 노벨도 땅속에서 자리를 차고 일어나 통곡해마지 않았으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수 있는가. 목적을 바로 세우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것이다. 목적은 행동을 통하여 도달하여야 할 목표이다. 사람은 모든 활동에 앞서 일정한 목적을 세우게 된다. 목적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따라 그 활동의 결과가 달라지게 된다.
바로 폭약의 발명이라는 하나의 사업이 노벨의 애초의 목적과 달리 전쟁광신자들의 전쟁의 목적에 리용됨으로써 인류에게 헤아릴수 없는 재난을 들씌우는 결과가 빚어지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사회적운동에서도 어떤 목적을 세우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 옳바른 투쟁목표를 세우고 투쟁하여야 운명개척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다.
이를테면 매 사람들은 인민대중의 한 성원으로 운명개척이라는 큰 배에 올랐는데 이 배는 이제 어디를 향해가야 하는것인가 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러면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사회적운동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주체사상은 이에 과학적해답을 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사회와 자연을 개조하고 인간을 개조하는 모든 투쟁은 다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인민대중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벌리는 사회적운동은 자주성을 실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회발전의 각이한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는 사회적운동은 자연개조와 사회개조, 인간개조의 세 분야에 다 포괄된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자연개조, 사회개조, 인간개조는 어느것이나 다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면 이에 대하여 하나하나 보기로 하자.
우선 자연을 개조하는 투쟁은 인민대중이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생활을 누릴수 있는 물질적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운동이다.
자연은 사람의 필수적인 생활환경이며 사람에게 필요한 물질적부의 원천이다. 그런데 자연은 스스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자료와 좋은 생활환경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먹을것도 있어야 하고 입을것도 있어야 하며 집도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생활수단은 자연에 미리 주어져있는것이 아니다.
사람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활수단을 로동으로써 자연에 있는 이러저러한것을 가지고 만들어내야 한다. 또 자연은 끊임없이 운동변화하는데 이 운동변화과정은 언제나 사람에게 유리하게만 진행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날씨가 좋고 비도 맞춤히 와서 농사에 유리하지만 어떤 때는 큰물이 나거나 모진 가물이 들어 농사에 매우 불리하다.
자연의 구속이란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요구되는 생활수단을 헐하게 그리고 필요한만큼 만들어내지 못하고 큰물이나 가물과 같은 자연현상이 가져오는 피해를 입게 되는것 등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자연의 구속은 아직 생산력이 높이 발전하지 못하고 자연의 맹목적힘을 완전히 길들이지 못하는데서 오는것이다. 그러므로 인민대중은 생산력을 발전시켜 자연을 더욱더 개조하며 정복하기 위해 투쟁한다.
사람이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 생활수단을 충분히, 그것도 아주 헐하게 만들어낼 때, 자연을 길들여 자연의 맹목적힘이 가져올수 있는 온갖 피해를 막아낼 때 넉넉하고 문명한 물질생활에 대한 운명개척의 요구가 실현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처럼 자연개조는 인민대중이 자연의 구속에서 해방하여 물질생활령역에서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운동이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구태여 자연개조요, 물질생활에서 자주성을 실현한다고 할 필요가 있는가고 반문할수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것이지만 사람이 자기 활동에서 목적을 바로 세우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이 물질생활에서 바라는것을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것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세상에는 자기의 근면한 로동으로가 아니라 남을 착취하여 배를 두드리며 잘사는 자들이 있다. 착취사회에서 착취계급은 근로인민대중의 피와 땀으로 창조한 물질적재부를 빼앗아내서 저들의 향락과 치부를 위해 리용한다. 반대로 인민대중은 자신의 고귀한 로동의 결과물을 빼앗기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에서는 잘 살고 못사는것이 물질적부를 생산하는데 바친 땀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인민대중이, 참된 사회적인간이 이러한 자들, 이러한 물질생활을 용납할수 있는가.
인민대중이 바라는것은 건전하고 평등한, 유족하고 문명한 물질생활이다. 단순히 물질적욕망을 충족시킬것을 목적하는 생활은 인민대중과, 참다운 사회적인간의 본성과 인연이 없다.
그러니 인민대중이 자연을 개조하는 목적은 철저히 자연의 구속을 없애고 물질생활분야에서 자주성을 실현하는데 있는것이다.
사람의 생활상 요구를 잘 먹고 잘 사는것 전부로만 생각하는것도 잘못이다.
남에게 예속되여 인간의 존엄이 짓밟힌 조건에서는 물질적으로 아무리 유족한 생활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동물의 생활과 다를바 없다.
사람은 결코 동물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단순히 물질적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있지 않다. 사회적인간으로서 존엄있고 보람차게 살기를 바라는것이 운명개척의 요구이다. 그래서 인민대중은 사회적예속을 강요하는 낡은 착취사회를 개조하기 위해 투쟁한다.
사회를 개조하는 투쟁은 인민대중이 온갖 사회적예속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생활을 누릴수 있는 사회정치적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투쟁이다.
사람은 사회적존재로서 일정한 사회제도하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생활한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평등하지 못하고 남에게 예속되면 가장 비참한 노예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남의 노예가 되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란폭하게 유린당하고 천대와 멸시속에 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노예란 예나 지금이나 온갖 고통과 불행의 대명사로 되여있다.
누구도 남의 노예가 되여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바로 착취사회에서 근로인민대중은 아무런 정치적자유와 권리를 못가질뿐아니라 초보적인 생존의 자유와 권리도 가지지 못하고 온갖 사회적악, 고통, 재난만을 당한다. 착취사회는 온갖 사회적악의 근원이다.
착취사회가 온갖 사회적악의 근원이라고 하니 문득 떠오르는 고대 그리스신화의 이야기가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사람들에게 신의 불을 훔쳐다주고 그들에게 기술과 지식을 가르쳐준후에 땅우의 생활은 한결 행복스러웠다.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에 크게 노한 제우스는 그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한편 땅우의 사람들에게 불행을 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야장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흙과 물을 반죽하여 사랑의 힘과 부드러운 소리, 녀신의 눈빛을 가진 한 아름다운 처녀를 만들라고 분부하였다. 헤파이스토스가 흙으로 만든 처녀는 놀랄만큼 아름다웠다.
신들은 그에게 생명을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판도라라고 불렀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였다.
판도라는 머리에 갓 피여나기 시작한 장미꽃화관을 쓰고 목에는 보석목걸이를 걸고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사전에 동생에게 신들이 주는 선물을 아무것이나 받아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강조하였지만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충고를 듣지 않고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 녀자를 자기의 안해로 삼았다.
그러자 얼마후 신들은 에피메테우스에게 고운 함을 선물로 주면서 그것을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가 그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싶어 견딜수 없었다. 그는 남몰래 함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기서 날개달린 조그마한 벌레같은것들이 왁 몰려나와 판도라를 둘러싸고 무섭게 쏘았다. 함안에서 나온 날개돋힌 이 자그마한 벌레는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고통》이였다. 이 《고통》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이 땅에서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런 끔찍한 불행들이 사람들사이에 퍼지게 되였다. 사시장철 푸르러있던 들판과 산들이 자기의 빛을 잃고 누렇게 되였고 사람들은 병마에 시달렸다. …
이런 이야기로부터 《판도라의 함》은 모든 고통과 재난의 대명사로 쓰이고있다.
결국 착취사회가 이 세상에 태여난것자체가 온갖 사회적악만이 쏟아진다는 《판도라의 함》을 열어놓은것과 같은것이다.
그러니 인민대중은 자본주의와 같은 착취사회제도를 불사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엄있는 존재로 살기 위해 투쟁한다.
지난 세기 영국의 어느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노예로 살기보다는 고난의 자유를 선택하리라.》
구태여 길게 말할것도 없이 지난날 왜 인민대중이 노예제도와 봉건제도를 반대하여 싸웠으며 자본주의제도와 식민지제도를 반대하여 피흘리며 싸웠는가를 상기해보자.
인류력사는 무엇보다도 근로하는 인민들이 사회적예속에서 벗어나 사회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투쟁의 력사, 사회정치적으로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력사였다.
인민대중이 사회정치적으로 자주성을 실현하지 못하고 남에게 예속되면 인간답게 살지 못할뿐아니라 자기 로동의 열매를 빼앗기게 되며 결국 아무리 자연개조의 성과가 크다고 해도 물질생활의 요구를 실현할수 없다.
지난날 노예와 농민들이 마소와 같이 일하면서도 자기 로동의 열매를 차지하지 못한것은 착취계급에게 사회적으로 예속되여있었기때문이다.
오늘날 생산력이 발전하였다고 하는 자본주의나라들을 놓고보아도 그렇다. 이 나라들에서 근로자들이 생산력이 발전한것만큼 잘 살지 못하고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이 나날이 격화되고있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생산은 근로대중이 하지만 그들이 사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본가들에게 예속되여있기때문이다.
그러니 인민대중은 우선 사회개조를 통하여 사회정치적으로 자주성을 실현하여야 물질생활의 요구, 자연개조의 성과도 달성할수 있다.
이처럼 사회개조도 자연개조와 마찬가지로 인민대중이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해 벌리는 운명개척투쟁이다.
사상문화를 개조하기 위한 투쟁도 자주성을 실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상문화생활은 인간생활의 기본령역의 하나이다. 사람은 물질적부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물질생활을 할뿐아니라 정신적재부를 창조하고 건전하고 풍부한 문화정서생활을 향유할것을 요구한다.
사상문화생활을 떠난 인간생활이란 있을수 없다. 바로 이런 리치를 담아 어떤 사람은 《사람은 곧 사상이다》고 했다. 또 노래없는 인생을 황야에 비유하기도 하면서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정신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온것이다.
이것은 물론 어떤 사상이나 문학예술이나 할것없이 사람들에게 참된 삶을 안겨준다는것이 아니다.
착취계급의 사상문화는 근로하는 인민들을 사상정신적으로 병들게 하며 착취계급의 노예로 만든다. 중세기의 봉건적신학이나 문학예술이 사람들을 통치계급에게 말없이 순종하게 만드는 도구였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 범람하는 부르죠아사상이나 색정문화, 폭력문화같은 썩어빠진 부르죠아문화가 사람들을 자본주의적착취와 억압에 항거하지 못하는 정신적불구자로 만들고있다는것도 론박할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낡은 사상과 문화는 사람들의 사상정신생활을 구속하여 그들을 무맥하고 맹목적인 존재로, 사람의 품격을 갖추지 못한 속물로 만든다.
사상적으로 뒤떨어지고 높은 과학기술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데서 아무런 힘도 발휘할수 없다.
이런것으로 하여 인민대중은 낡은 사상과 문화의 구속을 반대하고 자기 운명의 주인된 자각을 주고 운명개척의 앞길을 밝혀주는 선진사상, 자주적인 사상으로 무장하며 인간의 자주적본성에 맞는 진보적인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투쟁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것을 하나로 총화해보자. 사회와 자연을 개조하고 사상문화를 개조하는 모든 사회적운동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는데 그 근본목적이 있으며 결국 인민대중이 운명을 개척하는 목적은 자주성을 실현하는것이다.
그러니 운명개척의 큰 배는 다른데로가 아니라 인민대중의 자주성이 실현된곳, 자유의 기슭을 향해 항로를 정해야 할것이다.
왜 공상으로 되였는가
자본주의가 발생하던 시기 즉 16세기로부터 19세기초에 이르는 력사적시기에 착취와 압박, 사회적불평등과 그 기초에 놓여있는 사적소유를 없애고 사회적소유에 기초한 평등한 사회를 세울데 대한 사상을 제기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첫 선구자는 영국의 토마스 모어였다.
그는 1516년 자기의 저서 《유토피어》에서 당시 무너져가는 봉건주의도 아니고 새로 발생하고있는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리상사회의 면모와 그 실현방도를 그리였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어》와 그때로부터 100년후 이딸리아의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에서 제기된 리상사회에 대한 견해는 그후 18세기에 와서 프랑스의 모렐리, 마블리, 바뵈프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였으며 19세기초에 이르러 쌩시몽과 푸리에, 영국의 오웬에 의하여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봉건국가가 허물어지고 자본주의가 발생발전함에 따라 무자비하고 야수적인 자본의 착취와 억압, 빈궁과 고통속에서 시달리는 인민대중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동정하는 립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잘 사는 리상사회를 머리속에서 설계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설계한 리상사회를 현실에 세우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말았다.
푸리에는 최초의 《팔랑그》를 조직하기 위한 시도로서 1832년에 120만FF의 자금과 총주수 2 400주를 가진 주식회사를 조직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영국의 로보트 오웬은 자기가 설계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1824년에 약 1 000명의 인원을 거느리고 당시 《세계미개척지》로 알려지고있던 미국으로 넘어갔다. 거기에서 오웬은 3만정보의 부침땅과 건물을 사서 1825년에는 《하모니》라는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그는 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자기 재력도 정신력도 아낌없이 바쳤지만 공동체는 3년만에 무너지고말았다.
후날 맑스와 엥겔스는 이들의 학설을 《공상적》인것이라고 특징지었다.
우리는 흔히 생활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생각을 공상이라고 하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공상가라고 한다.
그러니 공상적사회주의자들의 리상은 처음부터 실현될수 없는 운명을 지닌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였는데 그 리유는 어디에 있는것인가.
리상이 허망한것이였던가.
아니였다. 리상은 정말 좋았다.
공상적사회주의자들은 리상사회를 착취와 압박이 없고 사람들이 유족하게 사는 사회로, 다같이 일하며 로동이 유쾌한것이 된 사회로, 도시와 농촌, 정신로동과 육체로동의 대립이 없고 서로 조화가 이루어진 사회로, 반목과 질시가 없고 모두가 화목하게 사는 사회로, 혼란과 무질서가 없고 생활이 통일적인 지휘밑에 조직진행되는 사회로 그리였다.
오웬의 설계에 의하면 《하모니》에서는 사회적소유에 기초하여 생산이 공동으로 진행되고 생산된 물질적부는 공동체의 수요를 훨씬 넘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연적요구》에 맞는 분배를 받을수 있게 된다.
《기계적, 화학적로동》이 널리 적용되여 로동은 즐겁고 유익한것으로 되며 육체로동과 정신로동이 조화롭게 결합된다.
푸리에가 설정한 《팔랑그》에서는 자기의 취미와 기호에 맞는 일을 《자유》롭게 할수 있기에 로동은 유쾌한것으로 되며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없어지게 된다. 《팔랑그》는 《우애이외에 어떠한 뉴대도 없는 자발적인 련합》이며 거기에서 전체의 리익과 개인의 리익은 일치된다.
쌩씨몽은 미래의 공동체를 《평등》의 원리에 기초하여 《통일》, 《조화》된 사회로 보았으며 일체의 특권을 반대하였다.
물론 공상적사회주의의 견해는 인민대중의 요구를 과학적으로 반영하지 못한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그린 미래사회의 설계안들은 말그대로 《리상향》이였으며 지상에서의 《천당》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왜 실현되지 못하고 공상으로 남게 되였는가. 그 가장 주되는 원인은 바로 공상적사회주의자들이 사회력사적운동이 인민대중자신에 의해 수행되는 운동이라는것을 알지 못하였기때문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인민대중은 자기의 손으로 사회의 모든 재부를 만들어내며 자기의 투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력사를 발전시킵니다.》
사회력사적운동은 자주성을 실현하려는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의 지향과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일어난다. 인민대중은 주어진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자연과 사회의 주인으로서 보다 자주적으로 살것을 지향하며 이로부터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사회적운동을 일으킨다.
인민대중의 자주적지향과 요구로부터 일어난 사회적운동은 그를 밀고나갈수 있는 힘을 가진 인민대중자체의 투쟁에 의하여 전진한다.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력사를 발전시키는 사회력사적운동은 투쟁을 동반하는데 이러한 투쟁을 벌리는것은 그 어떤 신비로운 존재나 그 어느 영웅호걸이 아니라 인민대중자신이다.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은 오직 인민대중자신의 투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인민대중은 자신이 력사적으로 축적한 정신적힘과 육체적힘, 그리고 단결과 협력의 위력으로 자연과 사회를 개조변혁하고 력사를 발전시켜나가는 거창한 위업을 실현함으로써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이처럼 인민대중의 운명을 개척하는 사회력사적운동은 인민대중자신의 의사와 요구에 따라 인민대중의 투쟁에 의하여 진행되는 자주적운동이다.
공상적사회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리치를 몰랐을 뿐아니라 사회력사에서 관념론적립장에 서있었다.
공상가들은 근로대중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하였으나 그저 그들을 《불쌍한》 사람, 《수난자》로 볼뿐이였고 그들에게 자기 운명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뿐아니라 그들은 력사와 인류의 운명이 인민대중의 투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인물》이 발견한 초현실적이며 초인간적인 《절대적진리》, 《영원한 정의》에 따라 결정되는것으로 보았다.
과연 이러한 관념론적력사관은 공상적사회주의자들에게 어떤 결말을 가져다주었는가.
공상적사회주의자들은 사회적불행과 고통을 빚어내는 화근은 결국 지배층과 유산자들의 무지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정치적권력과 물질적재부를 틀어쥔 인간들의 《비리성적》인 사고로 하여 사람들사이에 불합리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빈궁이 산생된다. 따라서 착취계급을 계몽하면 그들의 《선의》에 의하여 자기들이 리상으로 내세운 사회가 실현될수 있으리라고 공상가들은 단정하였다.
이로부터 공상적사회주의자들은 리상사회를 설계하면서 그 사회에 대한 설계를 군주나 부르죠아지와 그 대표자들을 계몽시킬수 있도록 작성하는데 힘썼다. 쌩씨몽의 견해에 의하면 사회적리상으로 되는 공동체에서의 산업과 상업의 개화는 《산업가》에게는 더 많은 리득을 주며 로동자들에게는 실업을 없애고 그들의 기능과 로임을 높인다. 나아가서 그는 《산업가》와 학자가 정권을 쥠으로써 임금로동자를 비롯한 근로대중의 처지가 개선되리라는 엉터리없는 주장까지 하였다.
푸리에는 미래사회에 있어서는 자본이 막대한 리자를 가져올 전망이 있다는것으로써 고리대금업자들을 유혹시키려 하였으며 《팔랑그》에서의 분배기준을 로동, 자본, 재능에 따라 5:4:3의 비률로 규정하였다.
나아가서 이들은 착취계급의 《선의》의 《힘》으로 자기들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야말로 정력적인 활동을 벌렸다고 한다.
오웬은 영국에서 로동조합들을 전국적으로 통합하던 시기를 전후로 하는 12년사이에만도 리상사회에 대한 자기의 설계안을 유산자들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500건의 호소문을 내고 약 1 000여회의 연설을 하였으며 2 000여건의 기사, 론설을 발표하고 200회나 넘는 방문려행을 하였다고 한다.
푸리에는 《팔랑그》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100만FF의 자금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자금을 대여주는 유산자를 환영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는 여러해동안 매일 어디에 나갔다가도 정한 시간이 되면 집에 돌아와서 그 어떤 자본가나 유력자가 돈을 가지고 나타나기를 밤늦게까지 기다렸다는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허공에 뜬 공상이 아닐수 없다.
탐욕을 계급적본성으로 하는 착취계급에게서 《선의》를 기대하는것은 비과학적인 환상이다.
착취계급에게는 사회적운동을 전진시킬 의사도, 능력도 없다. 이자들은 인민대중의 피땀을 빨아 탐욕의 배를 채우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탐욕에만 눈이 어둡고 남의것을 빼앗아 자기 혼자만 잘 살려는 반동적착취계급은 인민대중에게 그 무슨 《선의》를 가지고있는것이 아니라 인민대중을 적대시하며 저들의 착취와 억압을 유지하기 위하여 근로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사회적운동의 전진을 방해한다.
길게 말할것도 없이 력사를 두고 살펴보자. 언제 어느때 반동적착취계급이 스스로 력사무대에서 자기 자리를 양보한적이 있던가. 빠리콤뮨을 비롯한 력사적사실들이 보여주는것처럼 반동적착취계급은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을 악랄하게 탄압말살하려고 책동한다.
이런 착취계급에게 기대를 걸었으니 그 결과란 불보듯 뻔하지 않은가.
공상적사회주의는 결국 진보적학설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공상적사회주의는 왜 공상으로 되였는가. 공상가들의 운명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있는가.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은 그 본성에 있어서 그 자신의 의사와 투쟁에 의하여 전진하는 자주적투쟁이다.
그런것만큼 인민대중은 남에게 의존하거나 남의 덕을 바라지 말고 자기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주동적으로 떨쳐일어나 자기 힘으로 이 세상을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운명개척이라는 배의 사공이 다름아닌 인민대중자신이라는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인민대중이 벌리는 사회적운동을 운명개척이라는 큰 배에 비유하면서 그 배의 목적지가 자주성이 실현된곳, 자유의 기슭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자주를 향해 배를 전진시키는 사공도 다름아닌 인민대중자신인것이다.
결국 운명개척을 위한 인민대중의 사회적운동이 나아갈 항로는 자주를 향해 자주적으로 나아가는 자주의 항로인셈이다.
3) 창조의 로정
운명개척의 방식
1917년 10월 25일(신력으로 11월 7일) 밤 9시 45분 로씨야발뜨함대의 순양함 《아브로라》호의 포성을 신호로 하여 동궁습격이 개시되였다.
레닌의 지도밑에 인민의 편에 선 군대와 적위대들은 25일 뻬뜨로그라드에서 폭동을 일으켜 정거장, 우편국, 전신국, 은행, 국가기관들을 점령하고 동궁을 포위하였는데 부르죠아통치배들은 항복하는것을 거부하고 발악하였다. 하여 병사들은 《아브로라》호의 포성이 울리는것과 함께 물밀듯이 동궁으로 쳐들어가 림시정부대신들을 체포하였다. 폭동은 뻬뜨로그라드에서 승리하였다. 레닌은 《로씨야공민들에게 》라는 선언에서 부르죠아림시정부가 전복되고 국가주권이 쏘베트에로 넘어왔다는것을 선포하였다. 26일 제2차전로쏘베트대회는 레닌이 작성한 《평화에 관한 법령》과 《토지에 관한 법령》을 채택하고 최초의 쏘베트정부를 조직하였으며 그 수반으로 레닌을 선거하였다.
혁명은 전국에 급속히 퍼져가 1918년 2월까지 도이췰란드군대에 강점되지 않은 로씨야의 모든 지역에서 승리하였다.
레닌과 볼쉐비크당의 령도밑에 로씨야인민이 수행한 사회주의10월혁명은 지주, 자본가의 정권을 뒤집어엎고 로동자, 농민의 정권을 세운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였고 인민대중에게 광명한 앞길을 처음으로 밝혀준 력사적사변이였다.
지구의 6분의 1에 달하는 광활한 령토에 수립된 사회주의제도, 그것은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인민대중이 줄기차게 벌려온 창조적활동의 고귀한 산물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사회력사적운동은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인민대중의 창조적운동입니다.》
인민대중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벌리는 사회적운동과정은 창조의 로정이다. 달리 말하면 인민대중의 운명개척과정은 그들이 창조적활동으로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변혁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수 있다.
인민대중은 자기의 생활상 요구를 창조적활동을 통해서 실현해나간다. 그런즉 창조적활동은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의 방식인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람의 본질적특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창조란 낡은것을 변혁하고 새로운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활동이라고 쓴바있는데 인민대중의 창조적활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는 이 기회에 낡은것이란 무엇이고 새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명백히 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아직도 인민대중과 적대되는 착취계급과 반동세력이 존재하면서 저들의 리익에 맞게 낡은것을 새것으로, 새것을 낡은것으로 외곡하여 리용하고있기때문이다.
례컨대 이전 쏘련을 비롯한 동유럽나라들에서 사회주의를 붕괴시키고 자본주의를 복귀한 현대사회민주주의자들은 《새로운 사고방식》에 대하여 제창하였는데 이자들이 떠들어댄 《새것》이란 이미 실증된것처럼 낡은것을 되살린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 이자들의 《새것》타령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조하거나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을 념두에 둘 때 창조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인민대중의 리익의 견지에서 똑똑히 아는것이 중요하다.
인민대중이 낡은것을 없애고 새로운것을 만들어나가는 목적의식적인 개조과정이 바로 창조이다.
낡은것이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억제하거나 구속하는 사물현상이며 인민대중은 이러한 낡은것과 공존할수 없다. 인민대중은 낡은것을 없애는 방식으로만 자기 요구를 실현해나가게 되며 이것이 다름아닌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활동이다.
새것이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고 발양시키는데 이바지하는것이다. 처음 생긴것이라고 하여 새것으로 되는것도 아니며 누가 새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새것으로 되는것도 아니다. 착취계급이 인민대중을 억압하고 기만하며 회유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여러가지 법률과 사회적질서, 반동적인 사상과 문화, 도덕 등은 절대로 새것으로 될수 없다.
인민대중은 자기의 자주적본성에 부합되는 새것만을 요구하며 새것을 창조해나가는 방식으로 사회적운동을 벌려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인민대중은 우선 창조적로동으로 사회의 물질문화적재부를 창조해나간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자연을 정복하고 의식주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생겨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루도 중단함이 없이 로동활동을 벌려왔다.
로동은 모든 물질적 및 문화적재부의 원천이다.
인민대중은 자기의 창조적로동으로 로동도구를 만들고 발전시킨다. 인민대중의 창조적로동에 의하여 돌도구가 청동기로 발전하고 청동기가 철기로 발전하였으며 사람이 끌던 가대기가 집짐승이 끄는것으로 발전하고 오늘에 와서는 뜨락또르로 밭을 갈게 되였다.
인민대중은 창조적로동의 산물인 로동도구를 리용하여 먹고 쓰고 사는데 필요한 생활자료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불리한 자연환경을 유리하게 개조한다.
인민대중은 또한 창조적로동으로 과학과 기술, 문학예술을 창조하고 발전시켜나간다. 로동을 떠나서는 사람의 생활상 요구의 실현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으며 도대체 사람이 생존할수도 없다.
하기에 엥겔스는 《로동은 전체 인간생활의 첫째가는 기본조건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로동이 인간자체를 창조하였다고도 말해야 할 정도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사람의 창조적활동의 한 분야인 로동은 사람들이 자연을 개조변혁해나가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창조가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의 방식이라는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가 있다.
인민대중은 또한 자기의 창조적활동으로 사회적진보를 이룩해나간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것처럼 사회는 인간생활의 기본조건이며 인민대중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가 못누리는가 하는것은 크게 사회제도가 어떤가에 따라 규정된다. 그렇기때문에 인민대중은 낡고 반동적인 사회제도를 없애고 새로운 사회제도를 세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하게 된다. 이것은 물질적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물질적부를 생산하는것이나 리치상 다를바 없다.
인류력사가 시작된 이래 인민대중은 낡은것을 변혁하는 창조적투쟁으로 사회를 끊임없이 개조하여왔다. 줄기찬 인민대중의 창조적투쟁은 마침내 로씨야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번져졌고 지구상에 첫 사회주의사회를 탄생시켰던것이다.
사회주의, 이는 인민대중의 참된 삶의 보금자리이다.
사회주의사회에서 인민대중은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된다. 하여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압박은 없어지고 마침내 인민대중은 사회적예속에서 해방된다.
인민대중은 사회주의제도하에서 동지적으로 굳게 결합되여 창조적로동으로 자신의 행복의 열매를 가꾸어가며 사람들의 머리속에 남아있는 낡은 사회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가셔내기 위하여 힘차게 투쟁해나간다.
마침내 인민대중이 노예의 운명에서 영원히 벗어났으며 자기 운명을 자기 의사대로 결정하고 개척해나갈수 있는 사회적조건은 마련된 셈이다.
이야기가 좀 벗어난감이 있는데 이제는 인민대중의 창조적활동으로 되돌아가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것처럼 인민대중은 창조의 방식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인민대중은 운명개척의 배를 전진시키기 위해 노를 자신이 저어가야 하는데 인민대중이 노를 젓는다는것은 바로 창조한다는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그러면 왜 인민대중은 창조적활동을 벌려야만 자기 운명을 개척할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이 활동하는 대상의 특성과 관련되여있다.
사람들의 활동대상은 자연과 사회이다. 그런데 자연과 사회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자주적으로 살아갈수 있게 되여있는것도 아니고 또 스스로 그렇게 변하지도 않는다. 즉 자연의 구속이나 사회적예속은 인민대중의 운명을 구속하는 낡은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런데 낡은것을 그대로 두고서는 인민대중이 아무리 바란다고 하여도 자기의 생활상 요구를 실현할수 없다.
로씨야에서의 《피의 일요일》을 상기해보자.
《피의 일요일》이란 1905년 짜리정부가 평화적청원에 나선 로동자들을 대중적으로 학살한 1월 9일(일요일)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당시 파업을 일으킨 뻬쩨르부르그의 로동자들은 짜리에게 《진정서》를 내면 짜리가 저들의 요구를 들어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로동자들은 일요일인 1905년 1월 9일 이른 아침 짜리초상과 교회기발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짜리의 소굴인 동궁으로 행진하였다. 행렬에는 약 14만명이 참가하였다. 그들이 동궁앞광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대기하고있던 반동군대는 황제 니꼴라이2세의 명령에 따라 군중에게 일체 사격을 퍼부어 1천여명을 살해하고 2천여명을 부상시켰다. 동궁앞광장은 피로 물들었다. …
인민대중에게 착취와 억압을 강요하는 착취제도, 짜리전제제도를 그대로 두고서는 결코 로씨야인민이 빵에 대한 자기의 소박한 요구마저 실현할수 없었던것이다.
더우기 낡은것은 스스로 소멸되지 않을뿐아니라 인민대중자신이 없애버리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남아있으면서 인민대중의 운명에 해를 입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인민대중이 살며 발전하자면 자연을 개조하여 필요한 모든것을 만들어내고 사회적환경도 자기의 요구에 맞게 개조하는 창조적활동을 하지 않을수 없다.
결국 인민대중의 사회적운동과정은 창조의 로정으로 되지 않을수 없으니 창조야말로 운명개척의 방식인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창조적활동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를 보기로 하자.
기적의 원천
에짚트에 가면 우리는 고대에짚트문화를 대표하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게 된다.
인류문명의 개척기의 증견자인듯 그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있는 피라미드.
오늘 세상사람들은 당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할만치 거대한 건설규모, 그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하여 경탄과 찬사를 자아내는 명승고적들중 일부를 가리켜 7대기적이라고 부르며 사랑하고있다.
에짚트의 피라미드는 7대기적중에서도 첫번째로 손꼽히는 창조물로 되고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에는 근 180여개나 건설되였는데 여러 세기를 두고 내려오는 과정에 전쟁과 자연피해 등으로 파괴되고 현재 남아있는것은 80개정도라고 한다.
B.C. 5세기 세계를 일주하였던 그리스의 유명한 력사가 헤로도토스(B.C.484-B.C.425)는 에짚트의 이 유적들을 보고 《다른데서는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경탄과 위대라는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업적》이라고 극구 찬양하였다고 한다.
1799년 프랑스군이 에짚트에 침입하였을 때 프랑스군에 속해있던 어느한 사람은 이런 글을 남기였다. 《광대한 유적의 모양을 본 프랑스군은 저도 모르게 멈춰서서 누구라 할것없이 무기들을 땅에 내려놓았다.》
프랑스인들은 바로 거대한 피라미드의 웅장함에 완전히 매혹되여 넋을 잃었던것이다.
고대와는 비할바없는 발전을 이룩한 현대에 와서까지 세인의 놀라움과 찬탄을 자아내는 피라미드의 기적, 그 기적을 낳은 힘은 과연 무엇인가.
피라미드건설과 관련한 해명이 이루어지기전에 어떤 사람은 지구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그 어떤 우주인이 와서 세워놓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 근거를 보면 에짚트는 사막지대인데 그런 큰 화강석이 있을수 없다는것, 만약 있다고 해도 먼곳에서 날라와야 하는데 그때 당시의 운반수단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것이다. 또 피라미드의 네면이 동서남북방향을 향해있는데 그것은 실로 한치의 편차도 없이 정확한 방향에 놓여있으며 축조된 돌사이의 간격이 너무나도 치밀하게 째여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현대적인 측정수단을 가지고도 쉽게는 할수 없는것이라는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후 발표된 력사자료들에 의하여 론박되였다. 이 피라미드를 건설한것은 우주인이 아니였으며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생겨난것은 더욱 아니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인민대중의 무궁무진한 창조적힘에 의하여 력사가 전진하고 혁명이 추동됩니다.》
인민대중은 무궁무진한 창조적능력의 소유자이다. 인민대중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식과 실천경험, 높은 기술과 기능 등 력사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정신적재부를 체현하고있으며 거대한 물질적힘을 소유하고있다.
이러한 인민대중의 무궁무진한 창조적힘에 의하여 이 세상의 모든 물질문화적재부가 창조되고 력사가 전진하며 그 과정에 인민대중의 운명이 개척되여나간다. 인민대중의 창조적힘은 모든 기적의 원천인것이다.
바로 피라미드의 기적은 노예를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의 창조적지혜와 힘에 의해 이루어진것이였다.
오늘까지 남아있는 에짚트의 피라미드중에서 제일 큰것은 고왕국시기의 후프왕의 피라미드라고 한다. 까히라부근 기제촌에 있는 이 피라미드는 높이가 144.6m이고 그 한 밑변의 길이는 230여m이다. 한개의 무게가 2.5t이나 되는 화강석 230만개로 축조한것이 얼마나 정밀한지 조그마한 틈도 찾아볼수 없다.
운반수단이나 로동도구가 보잘것없었던 당시의 실정에서도 근로대중은 창조적지혜와 힘을 발휘하여 230만개이상이나 되는 돌을 먼곳에서 날라왔으며 큰 돌을 쪼개서 가공하여 쌓아올렸다. 그 가공방법을 보면 특별히 굳은 암석을 리용하여 돌에 구멍을 내고 거기에 나무쐐기를 박은 다음 물을 부었다. 그렇게 되면 쐐기가 불어나면서 팽창력에 의해 그것이 깨여졌던것이다. 돌을 가공하여 한돌기 쌓은 다음에는 그 주위에 모래산을 높이여 라선형식으로 길을 만들면서 돌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계속 쌓아나갔다.
뿐만아니라 피라미드의 수평을 보장하기 위해 네면에 물길을 내고 물높이로 수평을 맞추었는데 오늘날 현대적인 측정기구로 재여본데 의하면 남동쪽구석이 북서쪽의 구석보다 불과 1㎝높았다고 한다.
정말 고대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힘은 얼마나 놀랄만한것인가.
피라미드뿐이 아니다.
오늘까지도 사람들이 급수시설로 리용하고있을 정도로 견고하고 아름답게 건설한 로마의 물길다리와 규모의 방대성과 높은 조형미학적수준으로 하여 고대인들의 기술문화수준을 잘 보여주는 스핑크스, 그리스의 아르테미스신전, 알 이스칸다리아의 등대며 음향효과가 너무 좋은것으로 하여 특히 세상사람들의 놀라움과 경탄을 자아내는 에피다우로스극장은 또 어떠한가.
이처럼 인민대중은 자신이 체현한 자연에 대한 지식과 경험, 기능, 숙련에 의거하여 자연을 개조해나감으로써 사회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며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혹시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가 당시 고대 노예소유자사회에서 결코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에 이바지한것이 아니지 않는가고 반문할수 있다.
물론 그렇다. 어느한 책에는 이런 일화도 전해지고있다.
고대노예소유자국가의 한 왕이 창조의 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톰신이여, 나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 그러자 신은 대답한다.
《너의 수명은 수백만년, 너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느니라.》
하여 통치배들은 자기들의 영원한 생명을 자유로이 누리기 위해 《영원한 집》, 웅장한 무덤을 피착취근로대중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세워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피라미드라는것이다.
그러니 에짚트의 수많은 피라미드의 건설이 근로대중의 창조력을 다른데 랑비하도록 함으로써 운명개척에 저해를 주었다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돌을 들어올릴수 있는 간단한 기중기하나 없던 그때에 피라미드건설이 모름지기 수많은 인민대중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을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피라미드는 역시 인민대중의 창조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력사적증거물임에 틀림없다.
또 인민대중은 단지 자연을 개조하는 힘만을 가지고있는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개조능력, 혁명적변혁능력을 가지고있다. 인민대중은 자신이 체득한 사회에 대한 지식과 경험, 혁명적능력을 가지고 낡은 사회를 목적의식적으로 개조하고 변혁해나감으로써 사회관계를 끊임없이 개선한다.
하여 노예소유자사회와 같이 창조력을 운명개척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소수 반동적지배계급, 착취계급을 위해 허실해야만 하는 착취사회관계를 없앰으로써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적운동을 추동하는 힘을 그 어떤 개인의 능력과 역할에서 찾고있다.
물론 자연과 사회를 개조변혁하고 력사를 전진시키는데서 특출한 개인의 능력과 역할을 무시할수 없다. 저명한 과학자나 현대적인 발명가, 뛰여난 정치가나 군사가와 같은 개인은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변혁하는데서 커다란 공적을 세우고 력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개인은 아무리 뛰여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인류가 력사적으로 축적해놓은 지혜와 힘의 극히 제한된 부분만을 체현하고있다. 그리고 개인의 지혜와 창조적능력자체가 인민대중이 이룩한 재부를 체득한것이며 인민대중에 의거함으로써만 그것이 발양될수 있는것이다.
하기에 뉴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본것은 거인의 어깨우에 올라탔기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뉴톤자신이 과학적성공을 이룩할수 있게 된 비결이 자기 개인의 총명이 아니라 인류가 이룩한 모든 과학적성과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선데 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다.
인민대중의 창조력을 떠나서는 개인이 특출한 지혜와 능력을 소유할수도 없고 발양할수도 없다.
오직 인민대중의 창조적능력만이 운명개척을 위한 사회적운동을 떠밀고나가는 추동력으로 되는것이다.
인민대중은 바로 이런 창조적능력을 가지고있는것으로 하여 력사의 개척자, 자기 운명의 개척자로 되는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찾아낼수 있는가.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을 성과적으로 개척하려면 창조적능력을 부단히 키워야 한다는것, 이것이 주체사상이 가리키는 진리, 운명개척의 비결의 하나이다.
4) 운명개척의 조종간
목적의식적으로
지금까지 이야기한것으로 인민대중은 운명개척의 배에 자주의 돛을 올렸으며 인민대중자신이 노를 저울 준비도 된셈이다. 이제 배가 문제없이, 자신있게 목적한 자유의 기슭에 닿으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가장 중요한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배에서 제일 중요한것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배의 방향타, 키이다. 키를 바로잡지 못하면 배는 길을 잃고 헤매는 난파선이 되고만다. 그런즉 키가 없이 배가 떠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에서도 키처럼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이 성과적으로 전진하도록 조절하는 조종간이 있다.
《키를 놓치는것은 무덤을 파는것과 같다》는 로므니아의 속담도 있지만 조종간을 바로 쥐지 못하면 아무리 열의가 높고 적극적으로 투쟁한다고 해도 운명개척의 요구를 달성할수 없다.
그러면 운명개척의 조종간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 우리는 력사의 한 토막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1850년 7월 중국에서는 농민출신인 홍수전과 그가 조직한 《상제회》의 지도밑에 봉건적착취와 억압을 반대하는 대규모의 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
폭동자들은 1851년 1월 광서성 계평현 금전촌에서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 농민전쟁이 중국력사상 가장 큰 농민전쟁으로 기록되여있는 《태평천국》농민전쟁이다.
《태평군》은 100만명의 대군으로 장성하여 근 15년동안 거의 전국을 휩쓸면서 청나라 봉건통치제도를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았으나 결국 1864년에 실패하고말았다.
왜 그렇게 되였는가. 그 원인은 한마디로 말하여 이 농민전쟁이 자연발생성을 띠고 진행된데 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모든 혁명운동은 의식적인 운동입니다.》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사회적실천활동은 목적의식적으로 진행된다. 인민대중은 의식적으로 목적을 설정하고 수단과 방법을 선택리용하며 부닥치는 정황과 난관에 맞게 능동적으로 자기 행동을 조절통제함으로써 자연과 사회를 자기 요구에 맞게 개조변혁해나간다. 말하자면 사람의 사상의식이 운명개척의 조종간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적운동이 사람의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의사에 따라서 진행된다는것이 아니다. 일정한 사회경제적조건이 지어지면 필연적으로 그에 맞는 사회법칙이 작용하며 그것은 객관적성격을 띤다.
실례로 착취와 억압이 있는곳에는 반항이 있고 인민대중의 투쟁이 일어나는것이 필연적법칙이다. 바로 이 법칙에 따라 《태평천국》농민전쟁이 일어났던것이다.
그런데 사회법칙은 사람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활동을 통하여 작용하는것만큼 사람이 어떻게 활동하는가에 따라 법칙이 순조롭게 작용할수도 있고 그 작용이 억제되거나 제한될수도 있는데 그 여하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동에서 결정적역할을 하는것이 사상의식이기때문이다.(사상의식의 결정적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자기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인민대중이 높은 사상의식을 가지고 객관적인 사회법칙의 요구에 맞게 활동하면 사회는 인민대중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에 의하여 발전하게 되는것이다.
바로 인민대중이 의식수준이 낮아 객관적법칙을 제대로 인식리용하지 못하게 되면 사회적운동은 똑똑한 목적과 방향이 없이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자연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실패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맹목적으로 진행되게 되는데 이것이 다름아닌 자연발생성이다.
《태평천국》전쟁이 그러했다. 농민들은 봉건적착취와 억압을 반대하여 궐기하였지만 사상의식수준이 낮은것으로 하여 자기들의 투쟁을 목적의식적으로 벌려나가지 못하였다.
그들은 우선 투쟁목적을 똑바로 내세우지 못하였다.
사람의 활동은 목적을 세우는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사회적운동의 목적의식적성격은 무엇보다도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에 따라 진행되는데서 표현된다. 목적은 행동을 통하여 도달하여야 할 목표이며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여 이룩할 결과에 대한 예정이다. 의식되고 지향된 필요로서의 목적은 사유과정의 결과로 이루어진 사상의식의 하나로서 사람들은 목적에 규정된 목표와 방향에 따라 행동하며 그에 맞게 력량을 배치하고 보장대책을 세우며 수단과 방법을 선택한다.
그런것만큼 운명을 개척하는 인민대중의 투쟁에서 첫 공정인 목적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따라 그 성과가 크게 좌우되게 된다.
바로 농민들의 투쟁은 봉건적예속의 멍에에서 벗어나려는 목적밑에 벌린것이였지만 그것들은 사상적제한성으로 하여 자기 활동의 결과를 과학적으로 예견하지 못하였고 뚜렷한 강령과 방도를 내세우고 진행되지 못하였던것이다.
농민대중이 봉건적예속에서 종국적으로 벗어나자면 그것을 전사회적범위에서 제도적으로 고착시킨 봉건사회제도자체를 뒤집어엎어야 한다. 봉건사회제도는 온갖 봉건적예속을 산생하고 인민대중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근원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착취와 억압을 반대하여 일떠섰지만 개별적인 왕이나 봉건통치배들을 때려엎을 생각만 하였지 봉건제도자체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였고 더우기 미래사회에 대한 설계는 전혀 할수 없었다.
《태평군》은 1853년 3월 남경을 점령한후 이곳을 수도로 선포하고 일련의 진보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9등급으로 나누어 농민들에게 분배할것 등을 내용으로 한 《천조전무제도》였다.
여기에서 볼수 있는것처럼 농민들은 기껏해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달라는것, 농노에서 해방시켜달라는것, 부역을 삭감하라는것과 같은 부차적인 요구를 들고 투쟁하였을뿐 봉건제도의 전복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농민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새로운 왕을 올려앉혀 실현하려는것과 같이 왕에게 기대를 걸어 해결해보려고까지 하였다.
바로 《태평천국》농민전쟁을 지도한 홍수전은 《태평천국》을 세우고는 자신이 천황이 되였고 부하들을 제왕으로 봉함으로써 왕권중심의 봉건제도를 되살렸던것이다.
이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던가. 《태평천국》농민전쟁의 지도층안에서는 1856년 9월이후 권력쟁탈전이 로골화되고 부화방탕이 만연되였다. 지도층은 농민전쟁을 확대하고 종국적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점차 권세와 치부에만 몰두하였다.
이런 기회를 타서 봉건정부군과 유미침략자들의 공격이 강화되여 결국 1864년에 《태평천국》의 수도였던 남경이 함락되고 농민전쟁은 실패하였다.
비단 《태평천국》농민전쟁뿐이 아니다.
1627년~1644년 중국 명나라말기에 있었던 리자성농민폭동의 지도자였던 리자성도 자신을 황제로 칭하였었다.
심지어는 왕에게 기대를 걸었던것으로 하여 쓰라린 실패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중세농민들의 투쟁이 수다하다.
1899~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반봉건반침략투쟁이였던 의화단폭동이 서태후일파의 간교한 속임과 배신행위에 의하여 실패하였고 1381년 영국에서 일어났던 워트 테일러농민폭동도 왕과 타협하고 왕과 담판하는 방법으로 요구를 실현해보려다가 실패의 쓴맛을 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처럼 지난 력사적시기에 있었던 수많은 인민대중의 투쟁은 사상적제한성, 계급적 및 력사적제한성으로 하여 똑바른 목표를 내세우지 못하였고 수많은 실패와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착취와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목적과 달리 농민들은 또다시 새로운 착취형태에 얽매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태평천국》농민전쟁의 봉기자들은 이밖에도 사상의식수준의 제한성으로 하여 투쟁과정에 일련의 전략전술적오유를 범하였다.
사회적운동은 끝없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자연과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것만큼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에는 여러가지 정황과 난관에 부닥치게 된다. 부닥치는 정황과 난관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주저앉거나 무작정 나아갈것이 아니라 옳은 분석판단과 결심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자기 행동을 조절할 때에만 인민대중은 투쟁에서 승리할수 있다.
그런데 《태평군》은 남경을 점령한 다음 적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말아야 하겠으나 베이징으로 계속 진격하지 않은것을 비롯하여 돌이킬수 없는 전략전술적오유들을 범하였다. 하여 봉건정부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고 력량을 수습하여 농민군을 공격하여 진압할수 있게 하였던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계급적처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옳바른 투쟁강령을 내세우지 못한것으로 하여, 일련의 전략전술적오유들로 하여 인민대중은 투쟁에서 수많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결국 자신의 투쟁으로 봉건제도를 뒤집어엎은 다음에도 투쟁의 열매를 부르죠아지들에게 빼앗기고 또다시 자본의 노예로 전락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였던것이다.
이것을 한갖 력사로만 무심히 대하지 말라. 이전 쏘련의 유명한 작가였던 고리끼는 《과거의것을 모르고서는 현재의 참된 뜻과 미래의 목적을 알수 없다.》고 말한바 있다. 력사의 갈피에는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을 개척해온 장구한 투쟁사에서 피로써 얻은 경험과 교훈, 귀중한 진리가 새겨져있다.
그러니 우리 이제 그 력사가 가르쳐주는 귀중한 진리의 한가닥을 다시한번 심장속에 깊이 새겨두기로 하자.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은 목적의식적운동이다. 옳바른 사상이야말로 운명을 성과적으로 개척해나갈수 있게 하는 조종간이다. 인민대중은 옳바른 사상으로 무장하지 못할 때 사회적운동에서 자연발생성을 극복할수 없고 따라서 투쟁에서 승리할수 없다.
그렇다면 인민대중이 지녀야 할 옳바른 사상이란 과연 어떤것인가. 이제부터는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지레대
수학, 물리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인류과학사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고대그리스의 저명한 학자 아르키메데스(B.C.287- B.C.212)는 지레대의 원리를 발견하고나서 《나에게 지점을 달라. 그러면 지구를 움직일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거대한 지구를 움직일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레대》, 바로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에서도 아르키메데스의 그것과 같이 인민대중이 세계도 움직여나갈수 있는 거대한 힘을 발휘하도록 추동하는 역할을 하는것이 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혁명운동에서 결정적역할을 합니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 사회적운동에서 결정적역할을 한다. 인민대중이 운명개척을 위하여 자연과 사회의 개조에서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도록 추동하는 자주적인 사상의식이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지레대라고 할수 있다.
그러면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노는 역할은 어떤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주적인 사상의식에 대한 리해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사상의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사람의 행동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의 본질적특성의 하나인 의식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
의식은 지식과 사상의식으로 나뉘여지는데 여기에서도 기본은 사상의식이다.
사상의식은 사람들의 요구와 리해관계를 반영한 의식형태이다. 사람들은 사물현상에 대한 일정한 요구와 리해관계를 가진다. 사람들은 사물현상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그것을 어떻게 개조변혁하여야 하는가 하는것을 판단하고 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사람들의 이러한 요구와 리해관계가 뇌수에 반영되여 사상의식을 형성한다.
사람의 요구와 리해관계를 반영한 의식의 한 형태인것으로 하여 사상의식은 사람의 활동에서 가장 적극적인 작용을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든 활동을 자기의 요구와 리해관계로부터 출발하여 그에 맞게 진행하기때문이다. 사람의 활동치고 생활상 요구와 리해관계로부터 출발하지 않는것이란 없다. 이로부터 사람의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그의 요구와 리해관계를 반영한 사상의식에 의하여 규제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물론 사람의 활동에서 객관세계의 본질과 운동법칙을 반영하고있는 지식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그 어떤 행동에로 추동하지 못하며 행동의 목적과 방향을 규제하지 못한다. 지식은 사람이 어떤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게 될 때 그 행동이 객관적사물현상의 본질과 운동법칙에 맞게 되도록 작용할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이 자기 운명을 옳바로 개척해나가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은 옳바른 사상의식을 가지는가 못가지는가에 의해 좌우된다.
사람들이 자기 운명을 성과적으로 개척하도록 적극 떠밀어주고 고무추동하는것이 바로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자각이며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려는 의지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자각은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확고한 인식이며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는 자기 운명을 자기 힘으로 끝까지 개척해나가려는 굳은 각오와 결심, 백절불굴의 투쟁정신이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이처럼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의 근본요구와 리해관계를 가장 정확히 반영한 사상의식이며 따라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 운명개척을 위한 사회적운동에서 결정적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 떨쳐나서도록 적극 추동한다. 사람들은 착취와 억압을 받는다고 하여 투쟁에 나설수 있는것이 아니다. 오늘 자본주의사회의 수많은 근로자들이 자본의 착취와 억압을 당하면서도 그를 매장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지 못하고있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오직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높은 자각과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심을 가진 사람만이 투쟁에 나설수 있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길, 운명개척의 참된 길에 떨쳐나서도록 추동하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으로 된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또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 운명개척을 위한 사회적운동에서 사람들이 노는 역할을 규제한다.
1957년 주은래가 이전 쏘련을 방문하는 기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주은래는 흐루쇼브와 회담을 진행하면서 그의 수정주의정책을 비난하였다. 그러자 흐루쇼브는 주은래의 비난을 공격하면서 그의 계급출신을 헐뜯었다.
《당신의 비판은 아주 훌륭한데요, 그러나 나는 로동계급출신이지만 당신은 부르죠아출신이라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흐루쇼브의 이 말에 주은래는 《그렇습니다. 흐루쇼브동지,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적어도 한가지만은 꼭같지요. 그건 우리 두 사람이 다 자기 계급을 배반하였다는것입니다.》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계급사회에서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계급적성격을 띠며 계급적성격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어느 계급의 리익을 옹호하여 투쟁하는가에 따라 행동의 목적과 방향, 그 결과가 달라지게 되며 그것이 사회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게 된다. 즉 사람들의 행동상 차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계급적성격에서의 차이이다.
바로 사람들의 행동의 계급적성격을 규정하는것이 사상의식이다. 물론 사람들의 활동은 사회계급적처지에 기초를 두며 그에 의하여 제약된다. 그러나 사회계급적처지는 어디까지나 사상의식을 거쳐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로동계급출신의 사람이라고 하여도 자주적인 사상의식으로 무장하지 못하면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여 투쟁할수 없으며 반대로 착취계급출신이라고 하여도 착취계급의 반동성을 파악하고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가지면 착취계급에서 떨어져나와 근로인민대중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게 된다.
흐루쇼브와 주은래의 경우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있다.
흐루쇼브는 로동계급출신이지만 자기 계급을 배반한 추악한 변절자, 수정주의, 부르죠아사상에 물든 현대수정주의의 괴수였다. 그는 쓰딸린서거(1953년 3월 5일 서거)이후에 음모적인 방법으로 이전 쏘련당과 국가의 최고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인민대중의 자주위업, 사회주의위업을 수정주의진흙탕속에 빠뜨리고 나아가서 사회주의를 허물어버리려고 하였다.
반대로 주은래는 출신을 따지고보면 청나라 말기의 부유한 관리의 아들이였지만 자기 전 생애를 사회주의위업에 고스란히 바친 참된 인간, 혁명가였다.
계급적출신이 서로 다른 흐루쇼브와 주은래의 상반되는 인생행로가 바로 그들이 지닌 사상에 근원을 두고있는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주적인 사상의식으로 무장하여야만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에 적극 떨쳐나서 모든것을 다바쳐 투쟁할수 있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에서 발휘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투쟁력을 규정한다.
우리는 누구나 일생에 《웨렌부인의 직업》을 비롯한 수많은 희곡들과 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놓은 기형적인 허영심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조소한 인상적인 유모아적일화를 많이 남겨 유명한 19세기말-20세기초 영국의 극작가 죠지 버너드 쇼를 잘 알고있다.
그는 《세상에 장애없는 일이란 없다. 만일 장애없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의지가 없는곳에는 길도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말에서 볼수 있는것처럼 일반적으로 사람의 모든 활동에는 이러저러한 난관과 애로가 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면 반드시 의지가 있어야 하며 투쟁력을 높이 발휘해야 하는 법이다.
하물며 자연을 정복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거창한 위업인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과정에 어찌 난관과 시련이 없을것이며 이 투쟁에서 강의한 의지와 완강한 투쟁력을 발휘함이 없이 성과적전진이 없을것이라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 의지와 투쟁력을 발휘하는가 하는것은 전적으로 사상문제이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조선인민의 항일혁명투쟁사를 돌이켜보자.
인민대중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투쟁은 간고하다. 이 길에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 난관이 있고 때로는 가슴아픈 희생도 있다.
이러한 투쟁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려면 강한 의지와 투쟁력이 있어야 하는데 강한 의지는 자주적인 사상의식의 발현이다.
조선의 혁명가들이 국가적후방도 정규군의 지원도 없는 조건에서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의 100만대군을 상대로 20성상, 동서고금에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이 장기적이고 간고한 투쟁에서 승리할수 있은 비결은 어디에 있었는가.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여기서는 사상정신적요인, 높은 사상정신에 의해 발휘된 불굴의 의지력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누구나 그 고결한 사상정신세계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는 항일혁명투사들, 그들속에는 유격대의 진공로를 열기 위하여 서슴없이 적의 화구를 가슴으로 막은 투사, 원쑤들에게 체포되여 조직의 비밀을 루설할가봐 자기의 혀를 끊은 투사도 있었고 혁명가요를 부르면서 부상당한 다리를 자기 손으로 자른 투사도 있었다.
이들이 상상하기조차 힘든 모진 육체적고통, 지어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엄혹한 순간에도 주저없이 웃으며 투쟁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비결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의 주인된 높은 자각, 혁명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굳은 확신, 혁명의 길에서는 살아도 영광이고 죽어도 영광이라는 고결한 혁명정신을 드팀없는 신념과 신조로 삼은데 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에서 엄혹한 항일혁명투쟁의 한때였던 1932년 겨울을 회고하시면서 자주적인 사상의식, 자기 운명의 주인된 자각이 얼마나 강의한 의지와 불굴의 힘을 낳게 하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쓰시였다.
《그 겨울에 우리가 라자구오지에서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고 총탄에 맞아죽지 않은것은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무슨 힘이 시련속에서 우리를 일어서게 하였는가, 무슨 힘이 우리를 패배자나 락오분자로 만들지 않고 승리자로 만들어 항일의 기발을 그냥 추켜들게 하였는가고 자문하군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라고 긍지에 넘쳐 자답하군한다. … 나는 그때 우리가 주저앉으면 조선이 다시 소생하지 못한다는 자각을 가지고있었다. 우리가 죽어도 조선을 구원할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우리는 라자구등판의 눈사태속에 파묻혀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을것이다.》
1932년 겨울,
김일성동지께서 친솔하신 18명의 유격대오는 왕덕림의 반일부대가 쏘련으로 도주하여버리자 고립무원한 상태에 빠졌다.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돌아치면서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를 뿌리고 땅에서는 《토벌》에 동원된 일본침략군무리들이 사방에서 유격대를 포위하였다. 박달나무도 얼어터지는 혹독한 추위와 허리를 치는 강설때문에 좀처럼 앞으로 전진할수 없었다. 림시변통으로 그날그날을 넘기며 힘들게 저축했던 식량도 바닥나고 여름군복마저 다 찢기고 헐어서 살이 드러났다.
라자구의 이름모를 등판까지 왔는데 돌아갈 길도 묘연하고 남아있는 대원들이란 모두 스무살도 채 안되는 홍안의 청년들이였다. 헤쳐가야 할 앞길에는 가는곳마다 일본침략군이 우글우글하였다.
혁명이란 이다지도 간고한것인가. 불과 2~3년이면 인차 결판낼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항일혁명투쟁이 어쩌면 이렇게도 험한 벼랑끝에 와 서게 되였는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돌아가 지하투쟁이나 할것인가고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주저앉으면 조선이 다시 소생하지 못하리라는 자각, 나라와 인민의 운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하여 결국 죽는 한이 있어도 혁명을 계속하겠다고 맹세다지고 또다시 무장투쟁의 길에 올랐다고 교시하시였다.
참으로 영웅적인 조선인민의 항일혁명투쟁은 자주적인 사상의식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투쟁에서 결정적역할을 한다는것을 확증해주는 고귀한 력사이다.
력사는 우리들에게 자주적인 사상의식으로 무장한 사람만이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서 강의한 의지와 완강한 투쟁력을 발휘하여 온갖 난관과 시련을 뚫고 끝까지 싸워나가 승리를 이룩하게 된다는것을 엄숙히 깨우쳐주고있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이야말로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무궁무진하고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도록 함으로써 자연과 사회, 세계를 움직여 자기 운명개척의 앞길을 보무당당히 열어나가도록 고무추동하는 무기, 가장 믿음직한 지레대이다.
잠간, 우리 여기서 자주적인 사상의식이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을 위한 투쟁에서 결정적역할을 한다는 주체사상의 고귀한 진리, 이 진리는 무엇을 가르쳐주는가를 다시한번 새겨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인민대중이 참말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새 사회를 건설한다는것, 자기 운명개척의 요구를 실현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투쟁에서 인민대중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필승의 무기, 위력한 지레대로 튼튼히 틀어쥐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력사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진리이고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의 가장 중요한 비결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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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2023년 9월 9일 공화국창건 75돐경축행사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이날
June 26, 2025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2023년 9월 9일 공화국창건 75돐경축행사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이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2025년 2월 24일 주체적혁명무력의 최고군사정치학원인 김일성정치대학을 방문하시여 하신 연설에서 강군건설의
June 26, 2025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2025년 2월 24일 주체적혁명무력의 최고군사정치학원인 김일성정치대학을 방문하시여 하신 연설에서 강군건설의
2024년 8월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함주군 지방공업공장건설장을 돌아보신 후 동행한 지도간부들과 담화를 나누시였다.경애하는
June 25, 2025
2024년 8월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함주군 지방공업공장건설장을 돌아보신 후 동행한 지도간부들과 담화를 나누시였다.경애하는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2025년 2월 24일 김일성정치대학을 찾으시여 하신 뜻깊은 연설에서 가장 정의로운 위업, 가장 정의로운 국가,
June 25, 2025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2025년 2월 24일 김일성정치대학을 찾으시여 하신 뜻깊은 연설에서 가장 정의로운 위업, 가장 정의로운 국가,
조선에서 육아원, 애육원, 양로원들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각별한 관심속에 관리운영되고있다.조선에서는 2014년 4월 경애하는 김정은동
June 25, 2025
조선에서 육아원, 애육원, 양로원들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각별한 관심속에 관리운영되고있다.조선에서는 2014년 4월 경애하는 김정은동
2013년 6월 15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유평혁명사적지를 현지지도하시였다.유평혁명사적지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국해방
June 25, 2025
2013년 6월 15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유평혁명사적지를 현지지도하시였다.유평혁명사적지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국해방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2020년 9월 어느날 자연재해를 가시고 행복의 별천지로 전변된 황해북도 금천군 강북리를 돌아보시면서 새로 일
June 25, 2025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2020년 9월 어느날 자연재해를 가시고 행복의 별천지로 전변된 황해북도 금천군 강북리를 돌아보시면서 새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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